40대는 한국교회에 외치고 싶지 않습니다. 이창현 국장,(한반도평화연구원 사무국장, 이음과배움 대표)

2002년 한국교회에 뜨거운 감자였던 ‘주5일제’ 논쟁이 있었다. 주5일제 시행을 앞두고 무엇이 성경적인지, 어떻게 교회가 대응해야 하는지 찬반양론이 붙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주일성수 문제에만 매달렸을 뿐 주5일제가 가지고 있던 사회적 함의와 구체적 변화에는 안목이 부족했다. 그때의 논쟁 중 어떤 것이 우리에게 유산으로 남았는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

2019-09-21     박동현 기자
이창현

1990년대에 멈춘 한국교회

지난 20년간 한국사회 내 엄청난 변화가 있었음에도, 교회는 1990년대 이후 바뀐 것이 없어 보인다. 다음세대, 선교, 해외 유명신학자 초청, 한국교회의 미래 등 늘 비슷한 주제로 대형 컨퍼런스는 달력행사처럼 돌아온다.

학생들의 교육환경은 나날이 변해감에도 주일학교 침체와 붕괴 우려만 나올 뿐 8,90년대 스타일 집체식 수련회 외에 딱히 대안은 보이지 않는다. 명망있는 담임목사 1인의 능력으로 교회 전체를 평가하고, 이 담임목사에게 모든 것을 의존하는 교회구조는 더 심화되고 있다.

대형교회 성장전략, 개척교회의 몰락, 고령화 추세 속에 젊은 세대가 배제된다는 우려, 신학교가 배출하는 목회자가 많다는 지적, 문화 사역을 한다고 하지만 대중문화의 변화 속도를 여전히 따라가지 못하는 현실 등 1990년대나 지금 2019년이나 한국교회의 상황은 비슷해 보인다.(2018 KOSIS 통계청, ··고사교육비조사에 따르면 사교육비 지출 금액은 194,852억원.)

40대의 입장에서 굳이 1990년대를 꺼내 드는 이유는 한국교회가 (외형적) 최고점(最高點)에 있었던 이 시기에 20대를 보냈기 때문이다. 현 40대는 N97세대로 70년대에 태어났고, 80년대 한국사회 고도성장기에 학창시절을 보냈으며, 90년대 학번으로 대학에 입학한 세대다.

한국교회의 현 체제가 확립되고 외형적 부흥의 열매를 보이고 있을 때, 우리는 10대, 20대를 보냈다. 체계가 잡힌 유년주일학교를 거치고, 청소년 시절 CCM을 듣고 수련회와 문학의 밤을 통해 신앙을 키웠고, CCC, IVF, YWAM 등의 학생선교단체가 양적 최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에 대학을 다녔다.

때문에 정체 혹은 하락세에 있는 한국교회를 보는 40대의 시선은 복잡하다. 한국교회 최전성기시절을 보내며 계속하여 교회는 전진할 줄 알았고, 우리는 사회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더 역할을 하리라 생각했는데, 현실은 뒷걸음질을 거듭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우러러보았던 많은 목회자들이 몰락하고, 자랑스럽게 여겼던 여러 대표적 교회가 그 역할을 스스로 상실하는 것을 보며 자괴감에 빠진다. 교회가 1990년대에서 멈추어버린 것 같다.

한국교회와 40대의 간극 : ‘40대는 한국교회에 외치고 싶지 않습니다.’

90년대에 멈춘 한국교회는 40대의 현실 앞에서 간극을 보인다. 예를 들어보자. 교회는 지역에 기반하여 매년 태신자 초청주일 같은 행사를 연다. 분명 좋은 행사이고, 교회가 해야 하는 일이다. 그런데 2년 전세 때문에 이사를 반복하거나 아예 경기도 외곽으로 떠밀린 40대의 입장에서는 지역에만 기반한 목회가 다소 아쉽다.

연간 20조 안팎의 사교육비가 지출되는 현실에서 40대에게 자녀교육은 굉장히 중요한 이슈인데 교회는 자녀교육과 관련한 획기적인 예산편성이나 구조변동에 발걸음이 더디다. 공공부문은 인터넷으로 투명하게 행정공개를 하고 있고, 회사에서는 명확한 지출기준을 가지고 세세한 재정보고를 해야 하는데 교회는 여전히 주먹구구식 회계보고의 모습을 보인다.

인터넷 댓글, SNS를 통한 자유로운 의사개진이 일상이 되어 있는 40대의 눈에 교회는 공론의 장이 부족하고, 수평적 발언이 금기시되는 곳이다. 특히 40대는 한국사회의 최신 변화에 민감하고 이에 대한 교회의 해답 또는 공동체적 고민을 기대한다.

40대에게 재테크, 부동산 폭등, 비정규직, 이혼, 자녀의 교육격차, 남북통일, 복지문제는 일상에서 부딪히는 현실의 문제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이 문제는 언급자체가 금기시되거나 설교시간에 단편적이고 일방적인 의견에만 머무는 경향이 있다. 삶의 한복판의 문제가 교회에서 괴리되는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40대는 한국교회에 외치고 싶지 않다. 40대가 보기에 한국 교회는 우리의 일상과 동떨어져있거나 세상 속에 감당하는 영역이 너무 제한적이다. 한국교회는 2040 세대가 처한 현실에 대해 어떤 관심이 있는가? 또한 내 의견이 교회에 받아들여질까 의문도 든다.

이미 교회는 단단해진 구조를 가지고 있다. 리더십은 고령화되었고, 그 기준에 맞추어 눈도장을 찍어야 안수집사가 되고, 장로, 권사가 된다. 우리 부모님 세대는 스스로 교회를 세워가며 직분을 받는 것이 영광이었지만 우리세대는 이미 구조화된 교회 속에 나를 끼워 맞추는 것 같아 주저하게 된다.

게다가 40대는 근본적으로 한국교회가 우리가 처한 현실을 돌파할 능력이 있는 것인지 의문을 가진다. 내 인생을 걸만큼 교회는 진짜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이런 주저함 속에 40대는 점점 한국교회에 외치는 것을 꺼린다.

40대가 보는 한국교회는?

그럼에도 40대의 입장에서 한국교회를 분석해본다면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 한국 사회의 변화에 대해 교회가 제대로 대응 하지 못했다.

광복이후 한국사회는 한시도 쉴 틈 없이 변화를 겼어왔다. 그러나 최근 20년의 한국사회는 변화에 있어 그 이전 시대와 약간 결을 달리한다. 87년 체제 성립 이전과 직후까지 ‘경제화’와 ‘민주화’라는 거시적인 담론이 우리사회를 지배해왔다면 지난 20년은 복합적인 여러 변화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1990년대 이후 세계화는 우리 사회의 전통적 경계를 무너뜨렸고, IMF와 구조조정을 거치며 사회는 파편화되었다. 정치경제 거대담론에 우선순위가 밀렸던 가정, 문화, 여성, 교육, 환경 등 다양한 이슈가 등장했다.

2002년 한국교회에 뜨거운 감자였던 ‘주5일제’ 논쟁이 있었다. 주5일제 시행을 앞두고 무엇이 성경적인지, 어떻게 교회가 대응해야 하는지 찬반양론이 붙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주일성수 문제에만 매달렸을 뿐 주5일제가 가지고 있던 사회적 함의와 구체적 변화에는 안목이 부족했다. 그때의 논쟁 중 어떤 것이 우리에게 유산으로 남았는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

교회는 사회변화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기보다 방어에 급급하고 내부성장에만 관심이 있어 보인다. 90년대 이후 젊은 세대가 집을 사는 것은 더 어려워졌다. 여성 대졸자가 늘어나고, IMF로 맞벌이가 보편화되었으며, 가사분담, 워킹맘, 자녀교육, 저출생 문제 등 다양한 사회 변동이 있었다.

세 번의 정권교체, 기업구조조정, IT 산업의 발전으로 개개인의 참여가 증대되고 사회적 평등에 대한 요구도 거세다. 특히 10대, 20대를 거치며 한국교회의 정점을 경험하고, 지난 20년간 한국사회의 극적인 변화를 함께 체험한 현 40대에게 있어서 한국교회는 제대로 된 대응 없이 시간이 멈춘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는 한국교회가 과거 사회적 역할을 감당하고, 한국사회 변화의 원동력이 된 긍정적 사실마저도 뒤로하고 개체화된 교회성장에만 매몰되어 간다.

(2) 교회 내부가 경직되고, 구조화되었다.

사회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교회 내부적인 문제도 있다. 1970년대를 전후로 다양하게 개척되었던 한국교회들은 이제 성장을 넘어 구조화의 단계에 접어들었다. 개척교회 시절부터 교회와 자신이 혼연일체가 되어 헌신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1세대(193~40년대 출생)들은 이제 은퇴하였다.

이후 성장을 맡았던 2세대(1950~60년대 출생)들은 교회에서 가장 많은 인원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인구고령화 추세 속에 계속하여 주요 직분을 감당하고 있다. 2세대의 헌신 또한 존경 받을만 하고, 귀한 섬김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존경받는 걸출한 2세대 리더가 보이지 않고, 새로운 시대를 개척해갈 비전도 보이지 않고, 3세대(1970~80년대 출생)는 아직 미약하고 너무 파편화된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이 상황 속에 더 큰 문제는 한국교회는 역동성을 잃어버린 채 경직되고, 구조화된다는 점이다. 중대형교회는 체계화된 시스템으로 일면 유지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점점 옥상옥(屋上屋)을 만들어가고 있다.

담임목사를 정점으로 시스템이 완성된 교회는 1세대 개척세대에게는 유연하고 효율적인 구조였겠지만, 이후 세대에게는 쉽지 않은 틀이 된다. 40대가 교회 안에 새로운 시도를 하고 싶어도 의견 수렴의 창구, 작은 역할이라도 해볼 수 있는 기회는 이미 정해진 구조 속에서 사라지기 쉽다.

(지금 출석하고 있는 교회에서 겪은 일을 하나 소개한다. 본인은 새가족부 교사로 8년째 섬기며 교회에 찾아오는 새가족을 1:18주간 성경공부를 하고 있다. 새가족 교재가 장년 위주로 약간 딱딱한 감이 있어 그동안 젊은 새가족에게는 교회 리더십의 양해를 얻어 다른 교재로 진행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에 부목사님이 새로 오셔서 새가족부를 맡으셨다. 최근 신혼부부 새가족이 새로 연결되었다.)

(3) 교회의 문제에 대해 교회가 정면돌파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40대 평신도의 눈에 보이는 한국교회의 마지막 특징은 교회가 정작 교회 문제에 대해 침묵하거나 일관성 없이 대응한다는 점이다. 한국교회 안에서 목회자의 성추문, 교회 세습, 재정 비리, 교회 권력 다툼, 법령 위반 등 여러 사건이 있었고, 사회적 문제가 되는 일부 사건은 최근 들어 일반 언론에까지 이슈가 되었다.

평일 내내 신문기사, 방송뉴스를 장식하는 교회문제를 접하다가 주일에 교회에 가면 ‘우리교회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떤 응답을 할까?’ 기다린다. 그러나 교회는 대부분 이 문제에 대해 개교회 문제에 개입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이 문제를 공론화하면 교회 내 분란이 생긴다는 이유로, 아직 정확한 상황을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침묵한다. 본인이 출석하는 교회뿐만 아니라 주변 동료들이 출석하는 다른 교회에서도 비슷하다.

질문하고 싶다. 교회의 문제를 교회에서도 듣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교회의 문제를 이야기해야 하는가? 정작 교회의 문제는 침묵하고 성도 개개인의 삶이나 일반적인 사회문제만 언급하는 설교를 들으며 40대 평신도들은 어떤 삶을 반추하며 살아야 하는가? 사실 우리는 교회에 기대가 있기에 그 대답이 듣고 싶다.

40대 한 평신도 그리스도인의 바람

40대 평신도 그리스도인으로서 한국교회를 바라보며 몇 가지 제언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먼저, 한국교회가 40대가 처한 삶에 좀 더 깊숙하게 들어오길 기대한다. 저출생, 맞벌이, 양육의 문제는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재테크, 부동산, 복지문제에 대해 교회가 기본적인 가치기준을 논의할 장을 마련해 주면 좋겠다. 소득이 증대하고 교통이 발전하여 40대의 삶의 반경은 이전 세대보다 훨씬 넓어졌지만 그만큼 지역에 기반한 관계의 밀도는 낮아지고 있다.

그럼에도 지역 공동체는 중요하다. 교회가 새로운 패러다임을 고민하길 바란다. 교회가 장소를 제공하고 반값 학원비를 실천해주면 안될까? 다음세대가 문제라면 청소년들이 쉬고 교제할 수 있는 청소년 스터디 카페를 만들 수는 없을까?

둘째로, 한국교회가 우리 사회가 처한 문제에 대해 다각적인 시각으로 접근하고, 유연한 구조를 만들어갔으면 한다. 교회에 공론의 장을 만들고, 다양한 제안을 수용하는 창구가 필요하다. 현재의 권위, 리더십을 모두 해체하고 민주주의를 실현하자는 의미가 아니다.

작은 분야에서 자율성(재정/권한)을 주는 구조, 다양한 시도들에 대해 격려하는 구조를 만들어가야 한다. 지금은 하나를 제안하고 싶어도 교회에서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고 막히는 구조다. 요즘 회사 CEO들이 신입사원을 자신의 곁에 두어 이야기를 듣고, 계속 젊은 층의 의견을 수렴하는 기회를 만드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의견을 모으고 작은 일은 분담하는 구조를 만들고, 담임목사와 당회의 주변부터 좀 바꾸어가면 좋겠다.

(기존의 교재가 너무 딱딱하니 혹시 존스토트의 기독교의 기본진리로 성경공부를 하면 어떨지 문의하였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이 놀라웠다. ‘교회의 틀을 존중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특히 담임목사님이 만드신 교재인데 성도가 바꾸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원래 교재대로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새로 부임하신 부목사님은 교사들이 적절하게 의견을 통해 교재를 바꾸어온 것도 인수인계받지 못했고,

그 교재가 담임목사님이 아니라 부목사들이 짜깁기하여 만들었으며 처음 만들 때부터 추후 개정을 하자고 논의했었다는 것도 모르셨다. 그래서 이를 정중히 말씀드리고 재고해 주실 수 있는지 대답을 기다렸다. 역시 대답은 ‘No’. 교회가 정한 룰에 따라달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순종했다. 그러나 이전 세대들은 이 상황에서 순종하는 것이 덕스러울 수도 있겠으나, 40대 평신도인 나로서는 여전히 갸우뚱한 결과다.)

마지막으로 결국 본질의 문제에 교회가 나서주길 기대한다. 이 시대의 현실에 뿌리박으면서도, 여러 우려 속에도 정면돌파하는 비전을 보여주는 교회를 우리는 기대한다. 세상은 이것저것 달라진다지만 교회부터 갱신하고 본질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첨단을 달리는 이 시대, 호모데우스를 예견하는 이 시대에 왜 교회에 다녀야하는가? 우리에게 신앙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정의를 분간하기 어렵고, 악은 디테일마다 살아있으며, 삶은 더 파편화되고, 사람들은 더 목말라하고 있다. 분주한 달력행사에 매이지 말고, 이 시대를 관통하는 본질적인 메시지를 교회가 주었으면 좋겠다.

40대는 교회에 외치고 싶지 않다. 오히려 교회의 대답을 듣고 싶고, 함께 일하고 동역할 기회를 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우리에게 다시 본질을 일깨워주고, 소망을 주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