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루터>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강제적인 면죄부 판매는..

루터의 신앙 양심을 근본적으로 흔들게 되었다. 돈으로 구원을 살 수 있다’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순응할 수 없었고, 나아가 침묵할 수도 없었다.

2016-04-02     박동현기자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강제적인 면죄부 판매는 루터의 신앙 양심을 근본적으로 흔들게 되었다. 돈으로 구원을 살 수 있다’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순응할 수 없었고, 나아가 침묵할 수도 없었다.

루터는 자신이 가르치고 돌보는 많은 사람들에 대한 목회적 양심과 책임에 따라 설교에서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기 시작하였고, 전혀 개선됨이 없자 드디어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의 만인 성자 교회의 문 앞에 ‘95개 논제’를 내 걸음으로써 기존 교회와의 본격적인 논쟁에 들어가게 되며, 이것이 종교 개혁의 시작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가장 오래된 기록에는 교회의 문 앞에 논제를 내걸었다는 말도 없다. 더욱이 반박문은 루터가 손으로 쓴 뒤 인쇄되어 사람들에게 읽혔으며, 책으로 펴낸 뒤에도 교회의 문 또는 그 근처에 게시되었다는 말은 나타나 있지를 않다. 벽에 게시한 일을 처음 거론한 사람은 필리프 멜란히톤이며, 그는 루터가 죽은 직후 자신의 저서에서 루터에 대해 언급한 것이 반박문을 벽에 게시한 일을 기록한 최초의 것이다.

1515년 루터는 10개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을 감독하면서 서신 교환과 방문 등을 통하여 새로 발견한 복음의 씨앗을 전파할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자신의 깨우침이 얼마나 급진적인지 알지 못한 채 계속 성서 연구에 전념하고 있었는데, 면죄부 논쟁을 계기로 그것이 공공연히 드러나게 되었다.

면죄부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일곱 성사들 가운데 하나인 고해성사와 연관된 것이다. 사제는 통회하는 고해자의 죄 고백을 듣고 죄 사면을 한 뒤 죄책에 대한 보속으로 순교, 시편 낭송, 특별기도 등의 행위를 하게 하였는데 면죄부는 이러한 보속을 면해주는 증서였다.

그런데 면죄부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주요 수입원이 되면서 교회는 면죄부 영업에 열을 올렸는데, 실제로 요한 테첼은 “금화가 헌금 궤에 떨어지며 소리를 내는 순간 영혼은 연옥을 벗어나 하늘나라를 향해 올라가리라”고 신자들을 기만하였던 것이다.

그는 프레데릭 현자가 작센 영내에서의 면죄부 판매를 거부하자 경계 근처에다 면죄부 판을 벌여 놓았으며, 성서도 적절히 인용하고 연옥에서 당신들의 부모가 고통을 받고 있다면서 감정에도 호소함으로써 순진한 신자들을 현혹하였다. 이러한 타락에는 교인들도 원인을 제공하였다.

실제로 중세 교회의 신자들은 하나님께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진지한 신앙생활보다는 면죄부를 구입함으로써 죄의식을 면하려는 손쉬운 신앙생활을 좋아하였으며, 구원을 돈으로 살 수 있다는 교회의 주장이 과연 성서의 가르침에 부합하는가를 생각하지 않았다.

교구민들의 영혼을 염려하는 목회적인 책임감에 움직여 루터는 이미 이전에 행한(1516년 10월 31일과 1517년 2월) 설교에서 면죄부 판매를 비난하였었다. 그러나 고해 문제의 재고 요청들이 결국 실패하자 루터는 공개 논쟁을 요청하기로 결심하여 1517년 10월 31일, 제성기념일(신앙의 본을 보인 모든 성인의 날 전날 밤) 전야에 95개 논제를 비텐베르크성(城) 교회의 문에 내걸었다.

루터는 “우리의 주님이시며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하실 때, 그는 신자들의 전 생애가 참회되어야 할 것을 요구하셨다”라고 논제(제1조)를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복음의 재발견을 면죄부 문제에 적용하여 “교회의 참 보고(寶庫)가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의 거룩한 복음”(제62조)이라고 역설하면서, 면죄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자비에 비할 바가 아님을 천명하였다(제68조).

마지막 논제(제95조)에서 루터는 그리스도인은 면죄부와 같은 행위의 의가 아니라 ‘오히려 많은 고난을 통해 하늘나라에 들어간다’고 결론 내린다. 종교 개혁(영어: Protestant Reformation) 운동은 로마 가톨릭의 문제를 논박함으로써 교회개혁을 주장하였다.

십자가 신학.

애당초 학자들 간의 토론을 위해 내걸었던 95개 논제는 대량으로 인쇄되어 ‘마치 천사들이 전령이 된 것처럼’ 순식간에 전 독일로 퍼져나갔을 뿐 아니라, 전 유럽에 미치게 된다. 95개 논제 발표 후 5개월이 지난 1518년 4월에, 로마 가톨릭교회는 한 이름 없는 수도사의 주장 안에서 점차 비등하는 폭발력을 잠재우기 위해 그로 하여금 하이델베르크에서 열리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독일 분회에서 자신의 신학을 소개하도록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 모임은 루터의 주장을 결코 억누를 수 없었다. 오히려 그의 바르고 강한 주장은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수도원 담을 훌쩍 넘어서 온 세상에 메아리로 번졌으며, 면죄부 판매 논쟁을 한층 더 고조시켰다. 하이델베르크 논쟁에서 루터는 고난과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는‘십자가 신학’을 발표하여,‘영광의 신학’즉, 힘과 정복을 추종하던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신학을 비판하였다.

그의 십자가 신학은 인간은 구원을 받을만한 도덕적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던 영광의 신학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구원을 주장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강조한 은혜의 신학이기도 하였다. 루터는 십자가 신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영광의 신학은 통찰력을 갖고 있지도 합당한 신학도 아니다. 실제로 자연으로부터 출발하여 하느님을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신학자는 그리스도를 모르므로 고통보다 행적을, 어리석음대신 지혜를 선호하기 때문에 십자가 고통에 감추어진 하느님(Absconditus Deus)를 결코 알지 못한다. 그러한 자들은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빌 3:18)이다. 실제로 그들은 십자가의 고통을 혐오하고, 업적들과 그 영광을 좋아하며, 그리하여 십자가의 선을 악이라, 악의 행업을 선이라 부른다.

사람들은 자기 행업들에서 추론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남용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와 반대로, 즉 당신의 고통을 통해 인식되기를 원하셨고, 또 그리하여 가시적인 것에서부터의 인식을 새로이 입증하셨다. 이는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행적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는 분으로 하나님을 흠숭하지 않는 자들로 하여금 고통 안에 자신을 감추시는 분으로 예배하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라도 그런 자들이 하나님의 자기 비하와 십자가 사건을 인식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고, 그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리하여 하나님은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지혜롭다는 자들의 지혜를 배척하신다. '야훼 당신은 진정 숨어계신 하느님이십니다.'(이사야 45:15)

로마가톨릭과의 신학논쟁, 카예탄 추기경과의 논쟁과 칭 의론 주장. 루터가 자신의 주장 포기를 거부하자, 교황은 그를 종교 재판에 넘기려고 로마로 소환 지시하였다. 그러나 프레데릭 선제후와 대학이 이것에 반대하면서 대신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카예탄 추기경이 그를 심문하도록 주선하였다. 추기경은 1518년 10월 12일-15일에 소환당한 그에게 면죄부에 대한 교황의 교령(Unigenitus. 1343년)을 가리키면서 면죄부를 승인한 교황의 권위에 순종해야 한다고 위협하였다.

루터는 교황보다 공의회가 더 높으며, 모든 인간들은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의 최종적인 권위는 교회가 아닌, 성서가 가진다고 반박하였다. 그리고 죄인이라는 신분이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보시고 그리스도인을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해주신다는, 루터의 표현대로 수동적인 의인 칭의론(이신칭의)도 굽히지 않았다. 추기경은 결국 루터로부터 ‘나는 뉘우친다’(revoco)는 말을 얻어내지 못하자 프레데릭 선제후에게 편지를 써서 루터를 ‘로마로 넘기거나 영지로부터 추방’하라고 위협 섞인 강권을 하였지만, 선제후는 루터를 보호하였다.

다음 해 초(1519년 1월) 교황청의 특별한 호의의 징표인 황금 장미를 가진 밀팃츠가 선제후에게 나타났다. 그는 선제후가 루터를 추방하라는 카예탄의 요구를 이미 거부한 것을 모르고 루터를 추방하거나 로마로 압송할 경우 선제후에게 있을 유익을 선전하였다. 그리고 루터를 만날 수 있도록 허용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며 이 요청에 따른 만남은 허락되었다. 회합을 가진 두 사람은 이제 이후로는 피차 공적으로 침묵하기로 약속을 하였다.

라이프치히 논쟁

그러나 엑크가 침묵을 깨트리고 루터를 공격하자 루터는 동료인 칼슈타트와 함께 라이프치히로 따라가 그와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1519년 7월 4일- 월 14일). 잉골슈타트의 교수였던 엑크는 자신의 대학이 아닌 라이프치히 대학교를 교묘하게 비텐베르크 대학의 도전자로 끌어들였다. 이 두 대학은 오랜 경쟁관계에 있던 공작령의 작센과 선제후령의 작센을 대표하는 대학교들이었던 것이다.

이 논쟁에서 루터는 구원받기 위해 교황을 인정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반박하였다. 게다가 콘스탄스 공의회(1414년-1418년)가 체코슬로바키아의 종교개혁자 얀 후스를 잘못 정죄한 것을 들어 교회의 공의회조차도 과오를 범할 수 있고, 에베소서에 근거하여 교황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이 지상에서도 교회의 머리가 되심을 주장하였다.

루터와 에크의 논쟁은 다음 네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교황의 기원과 권위에 관한 것. 에크는 교황권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므로 교황에 순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교황의 권세는 위조문서인 '이시도리안 교령집(Isidorian Decretals)'에 기초하여 세워졌으므로 허위라고 반박하였다.

둘째, 성경의 권위에 관한 것. 루터는 오직 성경만이 신앙의 도리와 생활의 규범이 되므로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교회를 개혁하자고 외쳤다. 반면 에크는 '오직 성경' 사상은 중세 말 현대주의 사조를 따르는 이단들의 주장이라고 지적하며 루터를 이단이라고 몰아세웠다.

셋째, 연옥에 관한 것. 에크는 연옥사상이 마카비 2서 12장 45절에 나오므로 성경적인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나 루터는 마카비서가 성경이 아니라 외경에 불과하다고 하므로 신적인 권위가 없고, 따라서 연옥교리는 잘 못이라고 지적하였다.

넷째, 면죄부와 고해성사. 에크는 면죄부와 고해성사가 교회 전통에 근거한 것이므로 교회가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루터는 교회의 전통이 인간에게서 비롯된 것이므로 잘못될 수 있고, 오직 성경만이 오류가 없으며, 면죄부와 고해성사는 성경의 교훈에 배치되는 것이라고 반박하였다. 이 논쟁을 계기로 해서 루터는 작센의 게오르그 공작과 같은 이의 적수가 되었으나, 한편 그의 단호한 태도는 멜란히톤 같은 이를 우군으로 얻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이단 선고, 파문을 당함.

라이프치히 논쟁은 루터에 대한 기대도 증대시켰고 그에 대한 공격도 가속화 시켰다. 엑크는 라이프치히 논쟁에 대한 보고서를 통해 루터의 출교에 대한 교황의 교서를 이끌어냈다. 1520년 6월 24일 발표된 교서 《Exurge Domine》(주여! 일어나소서!)에서 교황 레오는 뉘우칠 수 있는 60일간의 말미를 주면서 이 기간 안에 루터가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으면 그와 동료들을 모두 파문할 것이라 위협하였다.

교서는 루터의 작품 중에서 41개 발언들을 열거하면서 ‘이단적이고 위법적이며 거짓’이라고 단죄하면서, 루터의 모든 저서를 불태울 것을 명령하였다. 루터는 자신의 책들이 루벵에서 불탄 사건 이후 그리고 파문 위협을 담은 교서가 아직 비텐베르크에 도착하기 전, 성(城)의 엘스터 문 앞에서 학생들과 함께 교황의 교서뿐만 아니라 로마 교회 법전의 화형식을 12월 10일 거행했다. 이로써 루터와 로마 사이의 모든 다리도 불에 타 버렸다.

루터에게 화형영장은 루터를 분개하게 했다.

“나의 이 말은 진리의 말, 건실한 말이며, 인간의 능력으로 가능한 한 충실히 땅 위에 하나님의 진리를 장려하고 인간의 영혼을 구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그대는 현세에서의 하나님의 대리인이라면서 사형 집행인과 화형으로 대답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에게 전하려한 까닭으로, 나와 내 진리의 말을 화형에 처하려는 것인가? 그대는 하나님의 대리인이 아니라. 악마의 대리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대의 교서라는 것은 종이를 더럽힌 거짓말이다. 그것이나 태워버려라. 그대는 그대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것이다. 나는 이렇게 하겠다."며 교황의 화형 영장을 태워버린다.

루터를 최종적으로 파면하는 교황의 교서 《Decet Romanum Pontificem》(로마 교황은 이렇게 말한다)는 1521년 1월 3일 로마에서 공포되었다. 자신에 대한 파문은 루터의 영혼 깊숙이 상처를 내었다. 사실 루터는 면죄부 논쟁이 한창 진행 중일 때에도 교황에 전적인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그는 면죄부의 오용들로부터 로마 교황을 보호하는 일이 바로 그 권위를 세워주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교황청이 로마교회를 적그리스도에게 넘겨주었다는 확신이 서게 되자, 그때 루터는 비로소 교황청에 반격을 결심한 것이었다. 따라서 루터가 과거와의 관계를 끊은 것은 급작스레 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이 관계에서 돌아선 것은 자기가 아니라고 하였다. 오히려 자기는 철저히 외면을 당하였으며 세 번이나 출교를 당하였다고 하였다. 중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