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천개의 생명이 있다면 모두 조선을 위해 바치겠다
선한 마음과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보아 아마 몇 십 년이 지나면 이곳은 주님의 사랑이 넘치는 곳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탄압이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저께는 주님을 영접한 지 일주일도 안 된 서너 명이 끌려가 순교했고, 토마스 선교사와 제임스 선교사도 순교했습니다. 본부에서는 철수하라고 했지만, 대부분의 선교사는 그들이 전도한 조선인과 숨어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1907년 구한말 조선에 도착한지 불과 9개월도 되지 않은 이듬 해인 1908년 24세를 일기로 죽은 미국 남감리교 선교사 루비 켄드릭(Ruby Rachel Kendrick)이 생전에 남긴 말이다. 이는 서울 마포구 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된 루비 켄드릭의 묘비에 새겨져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총회(예장통합) 제108회기 총회장 김의식 목사는 25일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서 루비 켄드릭 묘비명을 인용하며 총회 업무 시작을 알렸다.
김의식 총회장은 언더우드 선교사와 켄드릭 선교사가 안장된 외국인선교사묘역을 참배했다. 그는 켄드릭 선교사 묘역 앞에서 “켄드릭 선교사는 죽음을 앞두고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만일 내게 천개의 목숨이 있다면 조선에 바치겠다’고 썼다. 또 그녀가 유언으로 남긴 ‘내가 죽거든 텍사스 청년들에게 10명 20명 50명씩 조선으로 오라고 하세요’라는 말로 남감리교 텍사스 엡윗 청년회 소속 청년 20명이 조선 선교사로 자원하기도 했다.
이어 “켄드릭 선교사는 자신의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선교했는데, 우리는 풍요 가운데 만족하며 안주한다면 선교사 묘역 앞에 무슨 할 말이 있을까”라며 “우리 남은 생애 땅 끝까지 생명을 아까워하지 말고 복음을 전하자”고 말했다. 한국교회의 근간을 세우며 이 땅에 뼈를 묻고 잠든 선교사의 묘지공원인 양화진에 가면 조선에 와서 25세의 젊은 나이로 8개월 만에 생을 마감한 여선교사 루비 켄드릭의 묘비를 볼 수 있다. 여기에는 “만일 내게 천개의 생명이 있다면 그 모두를 조선에 바치리라”는 비문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1905년 캔자스 여자 성경 전문학교를 졸업한 루비 켄드릭은 1907년 텍사스 엡윗 청년회의 후원으로 조선 땅을 밟았다. 그러나 선교를 위해 한국어를 배우던 중 급성맹장염으로 쓰러져 수술을 받았지만, 젊은 나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녀는 죽어 가는 순간에도 앞으로 텍사스 청년이 10명, 20명, 50명씩 조선으로 오게 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리고 그녀의 유언은 20명의 엡윗 청년회 회원이 선교사로 결단하는 동기가 됐다. 다음은 그녀가 부모에게 마지막으로 쓴 편지 내용 가운데 일부다.
“조선 땅에 오기 전, 집 뜰에 심었던 꽃이 활짝 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하루 종일 집 생각만 했습니다. 이곳은 참 아름다운 곳입니다. 선한 마음과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보아 아마 몇 십 년이 지나면 이곳은 주님의 사랑이 넘치는 곳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탄압이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저께는 주님을 영접한 지 일주일도 안 된 서너 명이 끌려가 순교했고, 토마스 선교사와 제임스 선교사도 순교했습니다. 본부에서는 철수하라고 했지만, 대부분의 선교사는 그들이 전도한 조선인과 숨어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오늘밤은 유난히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일본경찰이 외국인을 죽이고 기독교를 증오한다는 소문 때문에 부두에서 저를 끝까지 말리셨던 어머니의 얼굴이 자꾸 제 눈앞에 어른거립니다. 아버지, 어머니! 어쩌면 이 편지가 마지막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이곳에 오기 전 뒤뜰에 심었던 한 알의 씨앗으로 이제 내년이면 온 동네가 꽃으로 가득 하겠죠? 그리고 또 다른 씨앗을 만들겠죠?
저는 이곳에 작은 씨앗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제가 씨앗이 돼 이 땅에 묻히게 됐을 때, 조선 땅에는 많은 꽃이 피고 그들도 여러 나라에서 씨앗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이 땅에 저의 심장을 묻겠습니다. 이것은 조선에 대한 제 열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지는 조선에 대한 열정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사랑합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처럼 130년의 짧은 기간에 일어난 기독교의 경이로운 성장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조선을 위해 “저는 이 땅에 저의 심장을 묻겠습니다”는 갸륵한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