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아픔" 김 지 철 목사 (소망교회)..
8월20일 남선교회 전국연합회 전국대회에서 특강에서..
본문: 마 23,37-39(눅 19,41-42)마 23,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38.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39.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눅 19,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As he approached Jerusalem and saw the city, he wept over it).
1. 한국교회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한국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큰 복을 받은 교회다. 가장 짧은 선교 기간, 130여 년 만에 이만큼의 축복을 경험한 교회가 세계 선교 역사에 또 어디 있을까? 우리 스스로도 놀랄 때가 많다. 무엇이 그런 복을 가져다주었는가? 여러 가지 요인을 들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영적이고 정신적으로 한국교회는 잘 무장된 교회였다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에 기초해서 세워진 교회였다. 이 민족이 지녔던 역사 현장의 슬픔과 아픔에 동참했던 교회였다.
한국교회는 새벽기도회, 십일조 헌금, 주일성수에 엄격했으며, 이웃을 위한 봉서와 섬김을, 또한 나라와 민족 속에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공의를 세우는 일을 기쁨으로 실천했다. 무엇보다 한국교회는 신앙의 순전함을 지키고 나라를 사랑했던 순교자의 피에 기초한 교회였다. 그리하여 일본제국의 억압을 이겨낼 수 있었고, 6.25전쟁의 참화 속에서 공산당의 박해를 물리칠 수 있었다. 군사독재의 사슬을 풀어내고 민주화의 길을 가게 했던 자리에 한국교회가 큰 몫을 행했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도 여러 가지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술 취함과 도박, 그리고 나태한 습성들을 끊어냈고 근면함과 성실함을 강조함으로써 생산적인 경제를 만드는 데 이바지했다. 그래서 가난했던 이 백성은 한강의 기적, 곧 경제적인 풍요를 경험하게 되었다. 믿음의 사람들이 각 분야에 진출하며 자기 역할을 했다. 지금도 대한민국의 사회 지도자층에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활동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자랑이며 기쁨이다.
하지만, 작금의 우리 한국교회, 목회자와 성도들의 현실을 더 깊이 살펴보면, 결코 낙관적으로만 현재와 미래를 바라볼 수는 없는 자리까지 와 있다. 여러 부정적인 일들과 사건들이 반복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목사’와 ‘장로’가 있다. 때때로 신문과 TV에 기사거리로 등장하는 목회자와 성도들의 추문들은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우리가 직접 교회생활을 하면서도, ‘이래서는 안 되지!’ 하며 잘못되었다고 여기는 것들이 교회 안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 있다. 우리 기독교가 위기를 맞고 있다는 증거다. 그것은 곧 교회의 위기이다. 21세기에 들어와서도 어쩌면 가장 변화되지 않을 뿐 아니라 변화되기 어려운 집단이 있다면, 그것은 교회 공동체가 아닌가라는 자조적인 탄식마저 나오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2. 하나님의 심판이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시작한다.
벧전 4,17: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하나님의 심판이 어디서부터 시작하는 것일까? 언뜻 보면, 외부에서 먼저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미 내부의 세계가 썩어 곪아 터지기 때문에 생긴 결과일 뿐이다. 사회의 기강과 가치관이 무너지고, 갈등과 미움이 증폭되고, 편 가르기가 난무한 것은 바로 이 시대의 영적인 위기가 극에 달했다는 표지다. 이런 위기를 바로 영적인 지도자들이 만들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도 그러했다. 당대의 정치(로마제국의 속국이면서 대 헤롯의 잔인한 통치), 경제(있는 자와 없는 자의 이분법적 극대화), 사회(주인과 종이라는 이중적인 계층구조와 이로 인한 갈등)의 문화적(그레코-로만 세계의 문화적인 위압)인 갈등과 위기가 팽배했던 시기였다. 무엇보다 그 중심에 심각한 종교적인 갈등과 위기가 놓여 있었다. 그것은 이미 구약의 예언자들이 선포한 대로였다. 유대 신앙은 형식화된 종교, 물질주의적인 종교, 이기적인 종교로 몰락하고 있었다.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대의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화있을진저!’라고 외치셨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언은 곧 당대의 정치 비판, 사회 비판, 경제 비판이었다. 하지만 가장 엄정한 비판을 받은 것은 당대의 정치, 경제인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의 영적 지도자로 알려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었다. 그들마저 돈을 좋아했고, 외형적인 직분에 연연하며 자기 자랑과 교만이 가득한 기득권층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의 자기 갱신을 추구하지 않는, 화석과 같이 굳어진 종교성을 가지고 스스로를 몰락의 길로 내몰았다.
3. 예수님의 아픔은 곧 하나님의 아픔이다.
1)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그 슬픔, 그 핵심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자기 상황을 인식하고, 그동안 범죄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다시 하나님 앞에 돌아오라고 강력하게 요청하셨다. 그런데 그런 일이 불가능해 보였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지도자들이 이를 완강하게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을 보면서 탄식의 눈물을 흘리셨다. 이런 모습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당시 시대를 비판하는 예언자들을 떠올리게 한다. 예수님과 예언자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의 슬픔과 아픔을 이해했다는 것이다.
사 1,4: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사 1,21: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정의가 거기에 충만하였고 공의가 그 가운데에 거하였더니 이제는 살인자들뿐이로다" 렘 15,5: "예루살렘아 너를 불쌍히 여길 자 누구며 너를 위해 울 자 누구며 돌이켜 네 평안을 물을 자 누구냐 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나를 버렸고 내게서 물러갔으므로 네게로 내 손을 펴사 너를 멸하였노니 이는 내가 뜻을 돌이키기에 지쳤음이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회개다. 하나님도 돌이키시기를 원하신다. ‘돌이킨다’라는 이 말은 인간에게 적용하면 회개한다는 말이다. ‘너희가 하도 배반하고 도망가기에 내가 한두 번 내 마음을 돌이켰느냐? 이제는 나도 힘들다’는 하나님의 탄식이면서 하소연이다. 2)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한 것 자체가 죄악이고 범죄다. 하지만 더 나쁜 것은 범죄한 후에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께 회개하며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37절: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마치 살아 있는 인격체처럼 예루살렘을 부른다. 두 번 반복한다. 예루살렘이란 이스라엘의 심장으로 거룩한 도시이며 평화의 도시를 뜻한다. 그런데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평화와 거룩함과 공의를 저버렸다. 예루살렘의 영적 상태가 심각했다. ‘예루살렘’은 그 성읍에 사는 사람들 전체를 지칭하지만, 무엇보다 종교적, 정치적 중심지에 사는 영적 지도자들, 정치적인 권력자들을 정면으로 겨냥한다. 예수님의 부르짖음에는 이들을 향한 통한이 담겨 있다. 그들은 무엇보다 창조주 하나님, 약속의 하나님께 돌아올 생각을 버렸다. 회개하기를 의도적으로 거부한다. 그런 모습이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런 모습을 보시면서 예수님은 애통하게 부르짖으신다.
38절: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사랑하셨다. 이들의 마음을 돌이키고자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셨다. 하지만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보낸 사람들을 죽였다. 하나님의 거듭된 사랑을 매몰차게 거절했다. 이것은 반복적이고 의도적인 반역이었다.
4. “회개와 용서, 화해케 하소서(창 50,20-21)"
올해 창립 91주년을 맞는 남선교회전국연합회의 주제가 무엇보다 눈에 띈다. ‘회개하게 하소서’라는 말이 첫 번째로 나온다. 옳은 주제 표어다. 왜냐하면 용서도 회개해야, 화해도 회개해야 따라오는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요셉과 형들이 서로 화해하는 장면이 나오는 창 50장을 주제 말씀으로 택했다. 이 장면에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요셉이 큰 관용으로 용서와 화해를 하기 전에 형들의 회개가 있었다는 사실이다(진정으로 회개하는가를 참을성 있게 지켜보던 동생 요셉의 모습: 창 42-45장 참조). 형들이 잘못을 뉘우친 뒤에야 요셉은 형들을 용서하며 형들과의 화해를 선언한다. 진정한 회개가 없으면 거짓된 용서만이 남기 기 때문이다. 뼈를 깎는 회개가 없으면 화해의 제스처만 드러날 뿐이다.
5. 진정한 회개 없는 한국교회
1) 예수님이 왜 당시의 종교적 지도자들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해서 ‘화있을진저’라는 말로 그들에게 독설을 퍼부으셨을까? 그들 안에 회개하지 않는 교만한 영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조훈현이 쓴 『고수의 생각법』에 복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복기란, 대국이 다 끝난 후에 대국 때 바둑판에 놓았던 대로 다시 놓아보는 것이다. 복기는 자기 성찰과 반성이다. 그의 말이다. “복기를 해야 무엇을 잘했고 무엇을 잘못했는지 정확히 알고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복기를 잘해두면 같은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을 수 있고, 또 좋은 수를 더 깊이 연구하여 다음 대국에 활용할 수 있다. 이처럼 승리한 대국의 복기는 이기는 습관을 만들어 주고, 패배한 대국의 복기는 이기는 준비를 만들어 준다”
바둑의 전문기사들은 바둑을 끝날 때마다 복기를 한다. 하지만 아마추어들은 복기를 하지 못한다. 내가 왜 여기에 두었는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복적인 실수와 실패를 한다. 복기가 안 되니 똑같은 수를 두고서도 깨닫지를 못한다. 한국교회가 신앙의 성숙한 전문성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아마추어적인 실수와 실패를 반복하고 있다. 무엇보다 신학을 전문으로 배우고 목회를 전념하는 목회자들이 아마추어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2) 예수님은 '너 자신을 향해 질문해 본 적 있는가?'라고 물으신다. 우리는 지금까지의 삶에 대해서 자기 정체성을 물어본 적이 있는가? 그 동안 남을 향한 질문을 많이 했다면, 이제는 나 자신을 향해서 할 차례다. '나는 누구일까? 내가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것일까? 내게 이 땅에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한다. 인생을 살아갈 때 속도도 중요하다. 그러나 속도보다 방향이 더 중요하다. 잘못된 방향으로 빨리만 가면 어디로 튈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향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있다면, 바로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인가? 왜 여기까지 왔는가를 묻는 것이다. 그래야 방향도 정할 수 있고, 속도로 낼 수 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향한 질문’이란 바로 자기비판과 갱신이다. 진정한 회개다. 이는 자기를 성장하게 하고, 성숙하게 한다.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는 시작이다. 만약 우리가 자기 자신을 향해 질문을 멈추면 성숙도 멈춘다. 자기가 자랑하는 기득권 속에 매몰된다. 변화를 거부한다.
6. 그렇다면 한국교회가 회개해야 할 자리는 어디인가?
1) 신학의 자리: 신학에 무지하고 어설픈 영적 지도자들이 많다. 신학에는 두 흐름이 있다. 하나는 ‘영광의 신학’(theologia gloriae), 다른 하나는 ‘십자가의 신학’(theologia crucis)이다. 보통 로만 가톨릭은 ‘영광의 신학’을 대변하고, 종교개혁자들과 그들을 잇는 개신교 신학은 ‘십자가의 신학’을 대변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흐름은 강조점의 차이라 할 수 있다. 두 신학은 더불어 가야 한다. 기차가 두 개의 선로 위에 양쪽 바퀴를 걸쳐야 전진하는 것처럼, 교회는 양쪽 신학에 모두 힘을 실어야 앞으로 나갈 수 있다. 이 둘이 서로를 배제하고 적대시해서는 안 된다. 십자가 없는 부활도, 부활 없는 십자가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의 변증법’ 속에 가장 역동적인 복음의 내용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오늘의 신학의 문제는 ‘영광의 신학’을 붙잡는다고 하면서, 단지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번영의 신학’으로 잘못 나아가고 있다. ‘십자가의 신학’을 추구한다고 하면서, 단지 연약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편에 서고 그들을 구제하고 봉사해 주기만 하면 되는 것처럼 오해한다. 십자가 신학이 ‘구제의 활동’에 머무르고 있다는 말이다.
‘십자가의 신학’을 상실하면, 기독교 신앙은 타락한다.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림을 망각하고 끊임없는 자기 갱신을 포기하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림을 잃어버리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가? 첫째가 목사들이다. 둘째가 장로들이다. 셋째가 집사들이다. 오히려 성도들은 지금도 하나님의 이름을 들으면, 두렵고 떨림으로 순종하려하고 있다. 이런 모습이 교회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드러나는가? 악과 불의를 행해도 너무 쉽게 용서를 받는 영적 지도자들이 많아졌다. 뻔뻔하고 거드름을 피우는 영적 지도자들이 많아졌다.
그 반대로 ‘영광의 신학’을 상실하면, 기독교 신앙은 능력을 잃어버린다.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생명, 부활, 영원한 천국의 능력을 맛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늘을 잃어버리고 땅만 밟고 산다. 부활을 잃어버리고 죽음의 두려움 속에 머물며, 초월의 약속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러면 현실적인 무능함 속에 좌초하는 신앙인과 교회가 되고 말 것이다.
2) 목회의 자리: 문제는 한국교회가 십자가의 신학과 영광의 신학의 변증법을 상실했다는 데 있다. 가난한 자와 함께만 있으면, 십자가의 길을 간다고 오만한 착각을 했다. 두렵고 떨림이라는 거룩한 경험이 사라진 것이다. 신앙이 하나의 종교로 변질되고 있다. 동시에 세상에서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면, ‘영광의 신학’을 경험한 것이라고 오해했다. 그리고는 ‘번영신학’에 매몰되었다. 번영신학이 추구하는 것은 자본주의적인 탐욕을 곁들인 성공신학이다. 현세적인 축복만을 추구한다. 곧 건강의 복, 부의 축적, 자녀의 출세, 성공신화를 만드는 것이 본질인 양, 신앙이 왜곡되고 변질된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이기에 기복적인 신앙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먹고 마실 것에 대한 요청, 세상에서 부와 권력에의 추구는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런 요청과 추구보다 더 큰 소원을 지니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예수님은 왜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고 말씀하셨는가? 사람들이 영적 우선권을 잊으니 예수를 믿기는 믿는데, 이기적인 그리스도인이 된다. 교회도 출석하고 예배도 드리는데 탐욕적인 그리스도인으로 머문다.
우리가 이웃을 위해 구제하고 섬기는 것이 얼마나 좋고 아름다운 것인가?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먼저 자기 실존의 연약함과 죄인 됨을 절감하지 않았다. 이웃을 구제하고 봉사했다는 것만으로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오해하게 되었다. 다시 강조한다. 우리교회가 ‘영광의 신학’을 잃어버리면, 기독교 신앙은 능력을 잃는다. 십자가의 신학을 잃어버리면, 교회는 타락의 늪으로 서서히 빠져들 것이다.
3) 그렇다면 교회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목사를 위해 존재하는가? 장로를 위해 존재하는가? 교인들을 위해 존재하는가? 제도적인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는가?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존재한다.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존재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주요, 우리의 구원주요, 역사의 주인 됨을 선포하기 위해 존재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된 축복을 전하기 위해 존재한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는 그 반대로 가고 있는 모습이 곳곳에서 목격된다. 곧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기 욕심을 채우는 교회의 모습이 보인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목적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세속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다. 우리 신앙의 근본동기가 무엇인가? 예를 들면, 가족들이 함께 기도를 한다. ‘우리 가족 중에서 목사가 나와야 한다. 장로도 배출되어야 한다. 가문의 새로운 전통을 만들자.’ 얼마나 고마운 기도인가? 하지만 문제는 그런 기도는 신앙의 한 과정이지 않는가? 어떻게 하면 우리 가정이 주님의 교회를 위해 잘 봉사할 수 있는가라는 근본동기와 목적이 더 중요한 것 아닌가? 이런 목표 없이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는 것이 가문의 목표라면, 이것은 완전히 세속화된 자본주의 세계가 맘몬이라는 우상을 섬기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예를 들면, ‘내 교회가 더 크다. 우리 교인의 숫자, 헌금이 더 많다’고 자랑한다. 거기에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의 사고가 붙잡혀 있다면, 그것이 바로 탐욕의 우상이다. 한국교회 중요 기관의 장을 맡기 위해 혈안이 되어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 말 사전에도 등재되어 있지 않은 ‘증경’이라는 말을 듣기를 얼마나 좋아하는가? 이런 ‘장’자리를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이 낭비하는가? 그것도 바로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으로!
4) 한 가지 마지막으로 목사로서 죄송한 마음으로 고백하고 싶은 것이 있다.
한국교회의 수많은 문제들이 목회자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앞으로 이를 해결해야 할 사람들이 주축도 바로 목회자들이라는 사실이다. 장로님들 권사님들 집사님들 앞에서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한 가지다. 목회자들과 함께 장로님들, 남선교회 여러분들이 우리 교회 개혁의 주체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늘 내 자신이 신학을 하며, 또 목회 현장에 있으면서 기억하는 말씀이 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하신 말씀이다. 고린도교회는 분열하고 분파했고, 도덕적인 부끄러움을 안고 있으면서도 자기 자랑에 취해 있었다.
고전 3,21: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의 것임이라. 22.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23.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바울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말한다. 첫째,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목회자를 자랑하지 말라. 장로님들을 자랑하지 말라. 교회의 외형을 자랑하지 말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라.
둘째, 바울도 아볼로도 게바도 다 성도들의 것이다. 영적 지도자들은 다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다. 교회와 성도들이 영적인 지도자의 소유가 아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국교회가 거꾸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목회자를 존중하는 장로님들 집사님들 때문에 한국교회가 축복을 받았다. 하지만, 목회자는 교회를 위한 존재이다. 교회가 목회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 교회가 장로교회라고 또한 장로들이 교회의 주인이 아니다. 장로님들께 부탁한다. 목회자를 평가할 때에 ‘번영의 신학’이라는 관점에서만 접근하지 않기를 바란다. 또한 50-60대의 장로님들이 30-40대의 성도들과 소통하기를 바란다. 우리 모두가 다 성도들의 것이다.
셋째, 영적 지도자들도, 교회와 성도들도 그리스도의 것이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주인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만이 진정한 주인이시다. 따라서 진정한 교회 개혁이란, 예수님이 주인 됨을 거절하는 교회 안에 침투해 들어온 우상적인 것들(물신적인 기복주의, 교회 내 관료주의, 가족주의, 교회 세습 문제, 지역 분파주의, 교회 사유화, 재정적 불투명성 등)을 배척하고 제거하는 것이다. 이 일에, 겸손하게 그러나 기쁨으로 참여하는 남선교회 회원들 다 되시기를 기도한다. 이 시대와 교회를 향한 예수님(하나님)의 아픔이 곧 목회자의 아픔, 장로님들의 아픔, 성도님들의 아픔이 되기를 소망한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 한다. 예수님께서 우리 한국교회를 보면서,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슬픔으로 탄식하시고 계신 것은 아닐까? “서울아 서울아, 대한민국아 대한민국아, 아니 한국교회야 한국교회야, 아니 그 중심에 있는 한국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인 목사들아 목사들아! 장로들아 장로들아!” 이렇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픔으로 울부짖고 계시 것은 아닐까? “내가 너희가 내 앞에서 회개하며 돌아오기를 기다린 적이 얼마나 오래인가?” 하나님의 심판이 먼저 교회와 영적지도자들에게 임하고 있다.
벧전 4,17: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