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백 년간 정신마저 철두철미하게 중국의 식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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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백 년간 정신마저 철두철미하게 중국의 식민지
  • 박동현 기자
  • 승인 2019.07.23 17: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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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끌어간 정신대 여성들에 대해서는 그토록 비분강개하면서도 중국이 수백 년간 끌어간 우리나라 수많은 공녀들에 대해서는 자비로운 침묵이 이어지는 것을 보면 분명히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공녀들은 성 노리개가 아니었으므로 괜찮다는 것일까? 정신대 여성들은 돌아왔으나 중국으로 끌려간 공녀들은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다. 귀족과 결혼하여 신분이 올라간 여인도 몇 명 있었으니 모두 영광스럽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실록 조선 왕조 책 커버
실록 조선 왕조 책 커버

일본은 우리나라를 36년간 식민지로 삼았다. 거기에 대한 연구는 엄청나게 많다. 지금도 일제 36년의 영향이라는 표현이 흔히 쓰이고 일제가 만들어 놓은 역사 왜곡이라든지 정치, 사회 등 각 부문에서도 많은 일제 잔존 관습들을 우리는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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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순서가 좀 뒤바뀐 것이 하나 있다. 36년간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친일파 명단도 만들고 극일을 위해 집념을 가지고 매달리면서도 오백 년 식민 지배를 했던 중국에 대해서는 한마디 비판도 없고 연구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이 끌어간 정신대 여성들에 대해서는 그토록 비분강개하면서도 중국이 수백 년간 끌어간 우리나라 수많은 공녀들에 대해서는 자비로운 침묵이 이어지는 것을 보면 분명히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공녀들은 성 노리개가 아니었으므로 괜찮다는 것일까?

정신대 여성들은 돌아왔으나 중국으로 끌려간 공녀들은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다. 귀족과 결혼하여 신분이 올라간 여인도 몇 명 있었으니 모두 영광스럽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공녀란 중국에 바친 조선 처녀들이다. 중국은 걸핏하면 말 몇 마리와 공녀 몇 명을 보내라, 은 얼마, 호피 얼마, 산삼 얼마를 보내라, 고자도 몇 명 보내라며 요구해 왔다.

그렇게 살아온 것이 중국과 우리나라의 관계인데도 기이하다. 우리나라가 중국의 식민지였다고 말하기를 모두 꺼린다. 병자호란 때는 심지어 30만 명이 포로로 끌려갔다.

우리는 가감 없이 완전한 중국의 속국이고 식민지였다. 식민지라는 용어는 국어사전에 다른 나라의 특수한 지배를 받는 나라로 설명되어 있다. 일본은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정치, 사회, 경제 모든 부문에서 일정한 제약을 가했다. 자기들 문자도 강요했다.

그렇다면 중국은 무엇이 다른가?

우리는 오백 년 내내 중국의 문자를 써왔다. 지금도 많이 쓴다. 강요하고 말 것도 없다. 한글이 만들어졌지만 불행하게도 완전한 우리 문자가 아니다. 중국 문자가 없으면 해독이 안 되는 반쪽 언어에 가까운 것이다. 말하고 읽는 것은 상관없지만 쓰는 것으로 들어가면 한글의 독창성이라는 것은 반감되고 만다.

무엇보다도 조선이 중국의 완전한 통제를 받고 있었다는 증거는 조선에서는 새 왕이 즉위하면 먼저 중국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는 점이다. 승인받지 못하면 무허가 왕이나 다름없었다.

새 왕위에 오르면 축하한다고 중국에서 사절이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수많은 선물을 가지고 사절들이 찾아가서 승인을 구했다. 완전히 거꾸로 살아왔다. 중국과 연호도 같이 썼다. 조선 어느 왕 몇 년이 아니라 중국 왕들의 시대에 맞춰서 예를 들면 명 홍무황제 25년이라고 썼다. 효종 즉위년은 청 순치황제 6년이고 1895년 고종 32년까지도 청 광서황제 21년이다.

한말에 서양의 외교관들이 숱하게 들어와 조선이 왜 중국의 연호를 지금까지 써오느냐고 핀잔을 주자 그때서야 비로소 심사숙고 끝에 건양 1년이라고 연호를 바꿨다.

세금을 바치지 않았으니까 식민지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화폐 경제 시대가 아니고 물건으로 바치고 거래하던 시대였는데 해마다 나라의 등허리가 휠 정도로 갖다 바쳤다. 안에서는 백성들이 굶어 죽어갔지만 조선의 명물을 바리바리 엮어서 갖다 바쳤다. 의주에 커다란 창고를 지어 놓고 비축해 두었다가 요청이 들어오면 얼른 가지고 떠났다.

조선이 중국에게 독립적인 일종의 연방이었다고 둘러 부치면 안 된다. 우리나라는 오백 년간 중국의 식민지였다.

고구려는 알다시피 당당한 독립 국가였다. 그들은 중국의 승인을 받아 왕위에 오르지도 않았고 공녀나 공물을 갖다 바치지도 않았다. 고려는 조선처럼 창피하게 굴지 않았다. 원나라에 대항하여 40여 년 피의 항쟁도 벌였다. 제주도까지 쫓겨 갔으면서도 삼별초군은 고려인의 저항과 불굴의 정신을 보여 주었다.

우리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왕은 고구려 광개토왕과 고려 말의 우왕이다. 광개토왕은 우리나라의 영토를 광활한 중국 대륙까지 넓혀놓은 분이다. 우왕은 우리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중국을 치기 위하여 군대를 출병시킨 분이다. 효종도 그런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작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다.

역사는 가정이 필요 없다지만 만약에 그때 고려군이 위화도를 건너 진격을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만주와 요동 지역은 큰 난관 없이 점령했으리라 추정이 된다. 그리고 그 뒤는 지루한 싸움이 되다가 필시 패했을 수도 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비록 졌어도 온 국토가 보복을 당한다 할지라도 우리 피 속에는 자주와 독립의 혼이 남았을 것이다.

중국은 원수라는 민족의 동질감이 굳게 뿌리내렸더라면 병자호란도 없었을 것이고 조선은 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김일성도 중국의 힘을 믿고 6·25 남침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일제 치하의 독립운동과 비교해도 당시의 작전은 엄청난 것이다. 5만 대군과 기마 2만 필, 중국에 대한 한을 품고 묵묵히 북진의 길에 나섰던 용사들.

이성계는 비록 현실감각이 있어서 이 작전을 배신했겠지만 그는 결국 오백 년간 우리 민족의 피와 혼을 끊어버린 사람이다. 피 속에 기개가 살아 있지 못하면 그건 인간이 아니고 민족이 아니다.

그는 위화도 회군을 하면서 장마철이라 활이 늘어지고, 전염병이 돌고 탈영병이 많고 왜구가 침범할지 모르며 소국이 대국을 거역할 수 없다는 등 4대 불가론을 배신의 핑계로 삼았으나 그것은 그의 입장에서 쓴 조선의 기록들이다. 늘어지면 우리 활만 늘어지는가? 장마철이면 우리만 불리한가? 비가 오니 시합을 못하겠다는 축구팀이나 마찬가지다. 장마철이면 적의 이동도 쉽지 않고 그 허점을 이용하려고 일부러 시기를 맞췄을 수도 있다. 도망병이 속출한다는 핑계도 그의 주장일 뿐이다.

그런 사고방식을 가졌던 사람을 왕으로 내세우고 조선이 출발하였으니 암담하였다. 그는 제일 먼저 고려의 우왕이 광폭하고 무고한 사람을 많이 죽이고 대국에 망덕을 저질렀으므로 폐하였다면서 말 1천 필을 보내 자신이 왕이 되었음을 보고했다.

그때부터 조선의 왕들은 철두철미하게 자신이 중국 황제의 신하라는 관습을 굳혔다. 중국의 황태자가 죽어도 마치 조선 황태자가 죽은 것처럼 성대한 제사를 올리고 걸핏하면 사은사라는 이름으로 사절을 보내 선물을 올렸다. 선물은 좋은 말 60마리 가 기본이다.

중국 황제는 이성계에게 왕의 호칭 대신 권지국사라는 칭호를 내렸다. 이성계는 답신 사절을 보냈다. “삼가 황제의 칙지를 받았사온데 내리신 말씀이 간절하고 지극하여 신은 온 나라 신민과 더불어 감격하고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억만년이 되어도 항상 조공을 바칠 것이며 송축하는 정성을 바칠 것입니다.”

조선에서 정월 초하루의 가장 큰 행사는 중국 황제의 궁궐이 있는 방향을 향해 절하면서 축하연을 벌이는 것이다. 이를 망궐례라 한다. 날씨가 혹독하게 춥고 왕이 병중에도 철저하게 망궐례가 행해졌음은 물론이다. 선대왕이 죽어 삼년상을 치르는 중에도 올렸다.

광해군 때 좌의정 이항복이 한번 제동을 걸었던 적이 있다.

“금년 겨울은 추위가 오락가락하여 감기가 크게 유행하니 오래도록 조섭 중에 있는 몸으로 함부로 바깥바람을 쐬지 않으셔야 합니다. 삼가 듣건대, 이번 초하루에도 영모전에서 친제를 모시고 이어서 인정전에서 망궐례를 행한다고 하셨습니다. 친제를 거행하는 것이야 당연한 행사고 좋은 날에 명나라 임금의 만세를 부르는 것은 정말 우리의 큰 경사입니다만 지금은 삼년상중입니다.

이런 때에는 모시지 않아도 크게 결례가 아닙니다. 옛날부터 노래 부르고 곡하는 일을 같은 날에 하지 않았기 때문에 길례와 흉례를 함께 행하는 것은 예를 아는 곳에서는 금하는 사항입니다. 같은 날 새벽에 면복을 입어 애곡을 하고서 곧이어 경사에 참여한다면 예법으로 보아도 온당하지 않은 듯합니다. 더구나 오래도록 병환 중에 있는 터에 무리를 하실 필요가 없으니, 예관으로 하여금 망궐례를 대신 올리게 하소서.”

명나라 황제를 향해 왕과 온 조정대신이 북쪽을 향해 절을 올리고 춤을 추며 천세, 만세 천만세를 외치던 그 광경을 생각해보라. 왕은 곤룡포를 입고 면류관 차림이다. 그 앞에 황제에게 올리는 표문과 잔칫상이 차려져 있고 그 표문에 왕이 엎디어 절을 올린다.

이런 것이 부끄러웠는지 점차 슬그머니 기록에서 빼버리고 정월 초하루의 기록조차 남기지 않은 것을 볼 때에 그래도 배알이 있었던 신하들이 조금은 있었던 듯하다.

인조 때부터는 정월 초하루가 아니라 동짓날로 날을 바꿨다. 동지 사흘 뒤에 명 황제의 생일이라 다시 성절 하례를 올렸다. 그러다가 청나라가 득세하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달라지더니 인조 25년이 되어 드디어 왕명으로 이 행사가 중지되었다. 명이 망하고 청나라의 세상이 되니 슬그머니 사라진 것이다.

망궐례가 중지되었어도 해마다 십수 차례 각종 사절단이 올라갔다. 황제나 황후의 생일에 성절사가 다녀왔음도 마찬가지. 애초에 조선이라는 국호도 중국에서 정해줬다. 태조의 지시로 우리 사절이 올라가서 '조선과 화양' 중에서 하나를 골라 달라고 아뢴 것이다.

중국은 조선을 동이라고 호칭했다. 동쪽의 오랑캐라는 말인데 이성계도 스스로 이런 표현을 썼다. 중국에서 노략질을 하던 여진족 일부가 우리나라로 도망치는 사건이 생겨 그놈들을 당장 붙잡아 보내라는 명령이 오자 “저희 오랑캐가 감히 대국을 어지럽히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곧 잡아 보내겠습니다.”

즉위한 다음 해부터 본격적인 공물 요구가 들어왔다. 말 1만 마리를 보내라는 것이 시작이다. 첫 번째라 그랬는지 중국에서는 말 값을 보내 왔다. 말 한 마리에 면포 2필이었으니 형편없는 가격이다. 한 필로 보통 세 사람의 옷을 지을 수 있지만 쌀 반 가마니 가격이었다. 그러니 겨우 쌀 한두 가마니 값으로 말을 가져간 것이다. 그래도 “감히 말 값 받을 것을 생각지도 않았는데 주시니 망극할 따름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런 글을 가지고 사은사가 또 갔다. 너무 사은사가 들락거리자 오히려 중국에서 중지령이 내렸다. 멀리 있는 작은 오랑캐들은 너무 들락거리지 말고 3년에 한 번씩만 오라 한 것이다. 들락거리면서 뭔가 염탐을 하고 각종 귀한 물건을 들여가는 등 좋지 않은 낌새가 이어진다고 판단한 때문이다.

사은사 이염은 들어가서 절을 할 때 태도가 불량했다면서 매를 맞고 초죽음이 되어 돌아왔다. 그 후 3년에 한 번씩만 들어오라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걸핏 하면 들어갔다가 입국시키지 않는 바람에 사신이 요동에서 되돌아오곤 했다.

조선에서 중국을 향해 제사 올리는 것은 황제 생일인 성절과 정월 초하룻날을 제외하고도 공자의 제삿날 등에도 모셨다. 조선에서는 왕이 되면 가장 시급한 일이 중국의 허가를 받는 일이다.

이런 이런 일로 왕이 바뀌었다고 보고를 하면 확실히 병으로 죽은 경우에는 1년 정도 내로 왕의 칭호를 허락한다는 칙서가 내려 왔다.

태조,태종,단종,세조,중종,인조등은 3년쯤 지나 비로소 허가가 나왔고 그동안은 권서국사라는 직책을 받았다. 광해군은 나라의 은을 죄다 털어 바치고 간신히 얻은게 그런 호칭이다. 심지어 순조는 왕비책봉까지 허가를 받았고 연산군은 세자도 허가를 받았다.

대신들의 관복도 중국과 같은 모양으로 만들었다. 중국의 인사법도 들여왔다. 명나라에서 하고 있는 읍·배례라는 것을 똑같이 시행한 것이다. 대신들은 청사에 들어와 서로 읍을 하고 대궐 밖에 나와서도 서로 읍을 하라는 명령이다.

중국에서도 가끔씩 사신이 왔다. 그 사신들은 황제의 이름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좌군도독부 즉 국방부의 지시사항을 가지고 온 것인데 그 사신들은 전부 귀화한 조선족 환관들이다.

그들이 오면 왕은 백관과 함께 교외에 나가서 영접을 했다. 심지어 말 1만 필을 공납하라는 명령서를 가지고 왔을 때도 왕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황제의 옥체가 만복하신가를 물었다.

이런 우리 조정을 그 환관들이 어떻게 생각했겠는가.

그중 한 놈은 돌아갈 때 “전번 사신들은 후하게 대접했다는데 왜 이번에는 이 모양인가. 내가 이런 초라한 옷을 입고 오니 사람 같지 않으냐”면서 제 옷을 잡아 뜯고 욕설을 내뱉기도 했다.

이런 환관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연일 큰 잔치를 베풀었고 심지어 그 환관들의 고향에 특별 우대를 했다. 직산현을 군으로, 밀양군을 밀양부로 승격한 것이 대표적이다.

말 1만 마리 진상 명령이 떨어지면 진헌 관마소라는 것을 설치하여 현직, 전직 관헌들로부터 우선적으로 말을 진상 받았으니 그 폐해라는 것은 지금 상상해도 엄청났을 것이다.

시간이 좀 지나면서 중국으로 보내는 사절들이 점차 관행화되었다. 사절단의 행차에는 정사, 부사, 서장관, 종사관, 통사, 의원 등 관속 40여 명 외에 수행하는 비장, 역관 등 수십 명이 따르고 그 외에 가마꾼, 마부, 군졸 등 하속이 있어야 하니 전체 규모는 수백 명이 되었다.

정기적으로 매년 4번씩 가고 그 외에 제반 크고 작은 행사들이 있어서 연중 쉬지 않고 가지만 가장 인기가 없는 것이 동지 사절단이다. 동짓날 전후 간다고 해서 동지 사절단인데 날씨가 추워 서로 가지 않으려 했다.

공물로는 조선의 특산인 인삼·호피·수달피·화문석·종이·모시·명주·금 등을 가져가고 중국에서도 약간의 답례품을 주기 때문에 오고가는 길이 모두 번잡하기 짝이 없었다. 이보다 더한 것은 명나라에 바치는 공녀였다.

젊고 미모에 머리까지 똑똑한 여자를 골라서 보내라는 지시가 시도 때도 없이 떨어졌다. 공녀뿐 아니라 고자도 보내라는 지시가 이어졌다. 환관의 쓰임새가 많은 터에 자체 숫자가 적으니 속국에 주문했을 것이다.

공녀는 조선 시대가 처음이 아니다. 뿌리가 깊어서 고려 충렬왕 이후 공민왕 때까지 약 80년 동안 처녀 공납사건이 50여 회나 일어났다. 원나라에 공납한 처녀 숫자는 남아 있는 기록만으로도 150명이 넘는다.

고려 고종 때는 몽골이 침입하여 고려가 항복하는 조건으로 동남동녀(童男童女) 각 1천 명씩을 요구한 적도 있다. 명목상으로는 고려를 복속시킨다는 정책이었지만 원나라에서는 여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다. 끌려간 이들은 대부분 궁전의 시녀나 노비가 되었다.

명나라 시대가 되어서도 부정기적으로 그런 요구가 그치지 않았다. 태종은 공녀를 보내라는 명령을 받자 당장 진헌색이라는 기구를 설치하고 동녀 모집에 들어갔으며 전국에 금혼령을 내렸다.

“진헌색을 설치하여 동녀를 채집하고, 중외의 혼가를 금하였다. 의정부 찬성사 남재, 참지의정부사 함부림, 한성 판윤 맹사성으로 제조를 삼고, 경차관을 각도에 나누어 보내어 처녀를 선택하게 했는데, 천민은 제외하고 양가의 처녀 13세 이상 25세 이하를 모두 골랐다. 온 나라가 흉흉하게 되어 이를 피하려고 몰래 서로 혼인을 시켜버리는 자가 매우 많았다.”(태종 8년)

세종 1년에 중국에서 온 사신 황엄은 불경을 인쇄할 종이 2만 장과 또 고자 40명을 청구했다. 세종도 마찬가지였다. 별수 없이 달라는 대로 보냈다.

중종 16년 5월에는 대사헌 홍숙이 와서 아뢰기를,

“여자와 고자 뽑는 일을 명나라 사신이 이미 여러 번 재촉했는데 천호 이수가 와서 또다시 채근을 하니, 이것은 저들이 이미 황제의 명을 받아 결코 그만둘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때 명에서는 3월에 무종황제가 죽고 세종이 즉위했다.) 그 가혹한 명령은 그 황제가 생존했더라도 우리가 한번 사정을 아뢸 수가 있는 터인데 황제가 붕서하였으니 이제는 결코 좇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황제의 명이 이미 내린 것이니 우리나라가 대국의 신하인 만큼 무조건 행하지 않는 것도 불경한 일이 되겠습니다. 다행히 새 황제가 즉위하여 지금 지난 시절의 폐단들을 제거하고 있다 하니 실상을 알면 반드시 중지하라는 명이 있을 것입니다. 등극사가 가는 편에 사유를 갖추어 알리소서. 중국에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라도 반드시 깨닫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영의정 김전이 아뢰기를,

“지금 중국의 칙사가 여기 와 있는데 도리어 다른 사유서를 보낸다면 명나라 사신들이 반드시 노하여 ‘본국에서 이미 한번 지시한 것이라’ 한다면 그 폐해를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선 어린 고자는 약간 명이나마 뽑아줘야겠습니다.”

중종도 결국 그들의 말을 따랐다.

확실하게 공녀 관습이 사라진 것은 청나라가 들어서면서부터다. 명나라는 청나라를 북쪽 야만 오랑캐라고 불렀지만 차라리 오랑캐들이 더 예를 알았던 결과가 된다.

조선에서 의주 땅은 중국으로 보내는 진상품 창고였다. 한꺼번에 가져가는 것이 힘들어 사전에 이곳에 귀한 진상품들을 비축했다. 그러다가 보낼 일이 있으면 신속하게 이동시켰다.

세종 때의 기록이다.

“황제에게 드리는 예물은 해마다 내려오는 전례의 방물 외에 별도로 말 50필, 황금 안장 4개, 석등잔, 종이 2만 장, 초피 5백 벌, 적호피 1천 5백 벌, 청서피 5천 벌, 교기 30필, 세면주 30필이고, 황태자와 중궁에게는 석등잔 각 3개, 교기·면주 각 10필을 더 준비하는 것이 편리할 것입니다.”

진상품의 물목이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인삼의 공출은 평안도 황해도 두 도에서 더욱 괴롭게 여긴다고 하니, 세자가 이번 올라갈 때 진헌할 인삼이 여유가 있으면 금년의 공(貢)은 감해주고자 한다” 하니, 호조판서 안순이 대답하기를, “현재 1천 근이 있습니다” 하였다.

해마다 굶주림과 질병으로 뒤덮였던 이 황폐하고 작은 나라에서 이렇게 지극정성으로 섬겼던 중국이다. 지금 남아 있는 그림 중에 영조가 중국 칙사를 맞이하는 영접도라는 것이 있다. 중국 칙사가 거만하게 가마를 타고 오는데 영조가 그 칙사에게 극진하게 허리를 굽혀 절하는 모습이다.

칙사 대접이라는 것은 조선의 용어인데 왕부터 그런 식으로 영접을 하고 있으니 신하들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중국은 왜 조선이 중국처럼 왕의 명칭을 건방지게 조(祖), 종(宗)이라 하느냐 책망을 해 왔다. 그냥 조선국왕이라 부르라는 것이다. 선조는 이에 답신을 보냈다.

“소방은 해외의 궁벽한 곳인지라 삼국 시대 이래 중국을 사모하여 예의며 명호 모두 중국을 모방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중국에 어긋난 것은 하나같이 바로 잡아서 미세한 조목에 이르기까지 굳게 지키고 이를 자손에 전했습니다.

오직 조, 종의 칭호만은 신라 고려 이래 잘못되고 그릇된 오류가 있음에도 구습을 그대로 이어받아 왔는데 이를 뉘우칠 줄 모르고 승계하여 왔으니 이는 실로 무지에서 망령되이 저지른 죄입니다. 이것으로써 죄를 주신다면 신은 비록 만 번 죽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당연히 중국으로 보내는 문서에는 모두 조선 왕 아무개,라고 적어 보냈다. 선조는 임진왜란 중 중국으로 도망가기를 원하며 보낸 편지에서도, “이제 오직 부모의 나라로 돌아가서 죽기를 바랄 뿐이온데.” 그 일방적이고 맹목적인 신뢰와 복종심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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