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칼럼) 故 백선엽 분향소에 벌금 부과, 정상 국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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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칼럼) 故 백선엽 분향소에 벌금 부과, 정상 국가인가”
  • 박동현 기자/송경호 기자  
  • 승인 2020.07.28 19: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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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나비 논평 통해 백 장군에 대한 홀대 개탄.
오늘의 자유민주 대한민국을 지켜낸 6.25전쟁의 영웅
번영 대한민국을 이뤄낸 안보 초석 한미동맹의 상징
청와대가 하지 않는 별세 영웅 추서를 백악관이 해줘.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 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크리스천투데이 DB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 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크리스천투데이 DB

샬롬을 꿈꾸는 나비행동(대표 김영한 박사, 이하 샬롬나비)이 故 백선엽 장군에 대해 6.25 전쟁영웅이자 오늘날 번영 대한민국의 안보 초석인 한-미동맹의 상징이라고 평가했다. 반면 ‘구국영웅’이 서울 동작동 현충원에 묻히지 못한 것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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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분향소에 서울시가 330만원의 변상금을 부과하겠다고 밝히는 등 故 백 장군에 대해 국가가 홀대한 것에 대해 개탄했다.

샬롬나비는 27일 논평에서 “백 장군은 낙동강 최후 방어선에서 병력 8,000명으로 북한군 2만여 명의 총공격을 막아냈다. 다부동 전투 승리는, 훈련기간이 짧아 ‘농민군’ 수준이었던 국군을 이끌고 만든 기적이었다”며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다부동 전투 때 하나님께 기도하는 신앙으로 적군을 막아내었다”고 전했다.

샬롬나비는 “종전 무렵엔 백선엽 장군은 미 대통령에게 한·미 방위조약 체결의 필요성을 설득해 한·미 동맹 체결에도 공을 세웠다. 백 장군은 대한민국 발전과 현재의 막강한 군을 건설할 수 있도록 초석을 놓은 영웅으로 추앙받는다”며 “오늘날 번영한 대한민국이 있게 한 안보의 초석인 한미동맹의 상징이었다”고 전했다.

또 “백선엽 장군은 미군 장성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진정한 대한민국의 군인이었다. 청와대가 하지 않는 별세 영웅 추서를 백악관이 해주었다”며 “미국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는 공식 트위터 계정을 통해 ‘한국은 1950년대 공산주의 침략을 격퇴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친 백선엽과 영웅들 덕분에 오늘날 번영한 민주공화국이 됐다’고 애도했다.

공식 소셜미디어 계정에 ‘부산에서 판문점까지, 한국군 최초 4성 장군의 전시 회고록’이란 제목의 백 장군 영문 회고록 표지 사진도 올렸다. 청와대가 하지 않은 영웅의 추서를 동맹국인 미국 백악관이 해준 것”이라고 했다.

이어 “지난 7월 13일 장맛비가 내리치는데도 광화문 광장에 마련된 6·25 영웅 백선엽 장군의 시민분향소에는 추모객들이 긴 줄을 섰다. 이 분향소는 정부가 아니라 청년 단체인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신 전대협)가 앞장서고 예비역 단체 등이 힘을 모아 차린 것”이라며

“장례식이 끝난 후 서울시는 7월 21일 330만원 변상금을 주최측에 부과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이런 정부가 과연 자유민주국가를 지킨 영웅을 바르게 추모하고 기리는 정상적 국가라고 할 수 있는가?”라고 개탄했다.

이어 “문재인 정부는 백 장군을 12만 6.25 전우가 잠든 서울 현충원에 모셔야 한다는 각계 요구도 무시했다”며 “국가보훈처는 지난 15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된 그를 친일반민족행위자라고 이튿날인 7월 16일 홈페이지에 명시했다. 정부가 육군장(葬)으로 백 장군을 모신 지 하루 만에 친일파로 낙인찍은 것이다. 이는 실로 반일종족주의 이념에 치우쳐 국가의 영웅을 모욕하고 그를 기리는 국민의 존경심을 훼손하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다음은 논평 전문.

백선엽 장군은 오늘의 자유민주 대한민국을 지켜낸 6.25전쟁의 영웅이었다.
그는 오늘날 번영한 대한민국이 있게 한 안보의 초석인 한미동맹의 상징이었다.

2020년 7월 10일 “6.25 전쟁의 영웅” 백선엽 장군이 백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육군장(葬)으로 치러진 백 장군 공식 빈소는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에 차려졌다. 시민들은 광화문 광장에도 마련된 시민분향소 소식을 접하고 조문(弔問)했다.

수많은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빈소(殯所)를 찾아 고인에게 예의를 갖추고 그를 추념(追念)했다. 14일까지 사흘째 추모객을 받았던 서울 광화문광장 분향소에는 “사흘 만에 8만명이 분향소를 찾았다”고 주최측인 전대협 의장은 전한다. 고(故)백선엽 장군에 대한 추모 열기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백 장군이 승리로 이끌었던 6·25전쟁 최대 격전지로 꼽히는 다부동 전투의 현장인 경북 칠곡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지역 원로들과 재향군인회가 나서 분향소를 만들고 추모객을 맞이하였다.

7월 14일까지 사흘간 추모객 7000여명이 전적기념관과 다부동전적기념관을 찾아 추모했다. 부산에도 15일부터 ‘부산시민분향소'가 연제구 연산동 부산시청 2층 정문 앞 광장에 설치돼 18일 오후 8시까지 운영되었다.

이러한 국민들의 뜨거운 조문은 그가 6.25전쟁에서 낙동강 전선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의 역할을 한 것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1950년 북한군의 8월 공세를 막아낸 1사단의 다부동 전투는 다부동이 북한군에 뚫리면 임시 수도 대구가 적 포화의 사정거리에 들어갈 상황이었다.

당시 30세의 나이로 1사단을 이끈 백선엽 사단장은 후퇴하려는 한국군 병사들을 가로막고 이렇게 말했다. "나라가 망하기 직전이다. 저 사람들(미군)은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이럴 순 없다. 내가 앞장설 테니 나를 따르라.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도 좋다." 그의 독려에 장병들은 결국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는 유언으로 “격전지의 전우들과 함께 묻히고 싶다”고 “격전지의 흙을 관에 넣어달라”고 했으며, “수의로 격전지의 군복을 입혀달라”고 하였다. 그는 평생 군인 정신으로 살았고, 죽을 때도 전우들과 함께 죽고자 한 군인이었다. 그는 미군에겐 전설이자 신화로 통했다.

그는 2013년부터 “명예 미8군사령관”으로 위촉받아 주한미군으로부터 미8군 사령관급으로 예우 받았다. 2018년 백장군 백수 행사에선 주한 미(美)해리스 대사가 그에게 무릎을 꿇고 그를 맞기도 하였다. 빈소에서 해리스 대사는 당시 사진을 품에서 꺼내 고인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전했다.

1996년부터 1999년까지 한국에서 근무한 존 틸럴리 전 전임미군 사령관은 자신이 한미연합사령부 사령관을 지낼 당시 백 장군과 깊은 교감을 나눴다고 소개하면서 백선엽에 대하여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와 안보에 전념한 매우 헌신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지도자"라고 평가하며 "백 장군은 나의 가까운 친구이자 스승이었다.

나는 언제나 그의 통찰력을 존경했다"며 애도(哀悼)했다. 샬롬나비는 백선엽 장군의 별세를 추념하면서 다음같이 천명한다.

1. 백선엽 장군은 오늘의 자유민주 대한민국을 지켜낸 6.25전쟁의 영웅이었다.

백 장군은 낙동강 최후 방어선에서 병력 8000명으로 북한군 2만여 명의 총공격을 막아냈다. 다부동 전투 승리는 역사가 짧아 '농민군' 수준이었던 국군을 이끌고 만든 기적이었다. 그는 낙동강 다부동 방어선 전투가 한창 벌어지던 1950년 8월 21일 대부동 전선의 천평동 계곡에 위기가 찾아왔다.

천평동 계곡은 대구를 향하는 중요한 길목이었는데 좌측 고지를 지키던 한국군 11연대 1대대(대대장 김재명 소령)가 지키고 있었다. 계곡 아래쪽 4킬로 길목은 마이켈리스 대령이 이끄는 미군 27연대가 지키고 있었다. 오전 10시 경 11연대가 공산군에게 기선을 제압당해 고지를 빼앗기고 다부동 쪽으로 후퇴하고 있었다.

이때 사단 지휘본부에서 백선엽 사단장은 미군 마이켈리스 대령으로부터 한국군이 싸울 의지가 없이 퇴각하니 미군도 천평동 계곡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다는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미군이 철수하면 다부동 전선은 무너지고 곧 바로 대구가 공산군의 수중에 들어갈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는 공포에 질린 병사들을 향해 "우리가 밀리면 미군도 철수한다. 내가 후퇴하면 너희가 나를 쏘라"며 선두에서 권총을 빼고 앞으로 고지(高地)를 향하여 돌격하기 시작했다. 사단장의 솔선수범에 부대원들이 따라오기 시작했다. 김재명 소령도 용감하게 앞장서서 부대를 지휘했다. 결국 대대는 삽시간에 고지를 탈환했다. 뒤이어서 마이켈리스 대령이 이끄는 미27연대는 북한군 전차 14대를 격파하는 대승을 이끌었다. 한미합동으로 다부동 전선을 끝까지 지켜낸 것이다

2.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다부동 전투 때 하나님께 기도하는 신앙으로 적군을 막아내었다고 한다.

백선엽은 당시 다부동 전선이 위태하다는 소식을 듣고 ‘잠간 기다려 달라, 현장 확인을 하겠다’고 다부동 쪽으로 급히 지프를 타고 갔다. 이 다급한 상황에서 백선엽은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하나님, 이번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이번의 위기에서 우리를 구해주신다면 앞으로 하나님을 열심히 믿고 따르겠나이다.” 이러한 기도를 드리고 다부동 지역에 도착할 때 병사들은 피로에 지친 모습으로 후퇴하며 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후퇴하는 장병들 앞으로 달려나가 소리를 질렀다. “우리는 여기서 더 밀리면 더 후퇴할 장소가 없다.

더 밀리면 망국이다....내가 선두에 서서 돌격하겠다. 내가 후퇴하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 목숨을 건 그의 영웅적 행동으로 대한민국을 구한 엄청난 승리 배후에는 백선엽 장군의 기도가 있었고, 그의 기지와 용맹, 목숨을 걸고 싸운 국군 장병과 미군들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던 것이다.

3. 백선엽 장군은 중공군과의 전투에서도 전술과 작전에 능해 이겨낸 전사로 평가받고 있다.

백선엽은 낙동강을 사수(死守)한 데 이어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미군보다 먼저 평양에 입성했고 1.4 후퇴 뒤 서울 탈환 때도 최선봉에 섰다. 그는 국군 창설에 참여했고, 휴전회담 대표를 지냈으며, 한국군 최초로 대장에 올라 두 차례 육군 참모총장을 맡으며 군 재건을 이뤄냈다.

당시 한국군을 ‘민병대’ 취급했던 미군도 그에게만큼은 최상의 야전 지휘관이라며 존경심을 아끼지 않았다. 2006년부터 2008년까지 한미연합사령관으로 근무한 버웰 벨 전 미군 대장은 백선엽을 "한국군의 아버지"로 평가했다. 그는 "백 장군은 미국의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조지 워싱턴이 미군의 아버지이기도 했던 것과 다름없다"고 했다.

벨 전 대장은 "백 장군이 한국전쟁 당시 침략자인 북한 인민군과 중공군에 대항해 혼란스럽고 극도로 불확실한 전투 작전 속에서 한국군을 거듭 승리로 이끌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벨 전 대장은 "백 장군은 전술과 작전에 매우 능했고 두려움을 모르는 전사였다"며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지휘력과 영웅적인 근접전투를 통해 병사들을 이끌고 결집했다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4. 백선엽은 오늘날 번영한 대한민국이 있게 한 안보의 초석인 한미동맹의 상징이었다.

종전 무렵엔 백선엽 장군은 미 대통령에게 한·미 방위조약 체결의 필요성을 설득해 한·미 동맹 체결에도 공을 세웠다. 백 장군을 향한 찬사들은 결코 과하지 않다. 백 장군은 대한민국 발전과 현재의 막강한 군을 건설할 수 있도록 초석을 놓은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새로 부임하는 주한 미군 사령관들은 백 장군을 찾아가 전입신고를 하고, 미육군보병박물관은 그의 육성증언을 영구보존하고 있다. 지난 7월 13일 빈소를 찾은 로버트 에이브럼스 주한미군사령관은 장군 영정(影幀)을 향해 함께 경례하고 유족에게 "백 장군은 진심으로 그리워질 영웅이자 국가의 보물"이라며 "한·미 동맹을 만드는 데 공헌했다"고 밝혔다. "백 장군은 한미동맹의 '심장'이자 ‘영혼'이었다. 그의 복무에 깊이 감사한다"며 "훌륭한 사람이며 깊이 애도를 표한다"고 위로했다.

5. 백선엽은 미군 장성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진정한 대한민국의 군인이었다.

주한미군은 2013년 그를 '명예 미 8군사령관'으로 위촉해 공식 행사 때 현역 미 8군사령관과 같은 예우를 했다. 월터 샤프, 존 틸럴리, 빈센트 브룩스 등 역대 한미연합사령관은 한미동맹재단을 통해 추모 메시지를 보냈다. 이들 전 주한 미군 사령관들은 "백 장군은 미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조지 워싱턴과 같은 한국의 아버지" "한·미 동맹을 강화한 진정한 영웅" "세계의 위대한 군사 지도자를 잃었다"고 애도했다.

월터 샤프 전 연합사령관은 "백 장군은 한미동맹의 위대한 '롤모델'이었다." "백 장군의 헌신은 역사로 기억될 것이며 그의 유산은 다음 세대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육군협회 회장인 카터 햄 예비역 미 육군 대장도 애도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사단법인 대한민국 육군협회가 전했다.

카터 햄 회장은 "백 장군은 전설적인 인물이며 한미동맹을 위한 한미 육군 간 관계 증진에 이바지한 분"이라며 "백 장군에게 영원히 감사할 것이다. 백 장군 뜻을 기리고 한미 간 끊을 수 없는 관계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6. 청와대가 하지 않는 별세 영웅 추서를 백악관이 해주었다.

나라의 영웅을 어떻게 대우하는지 보면 그 나라의 수준을 알 수 있다. 청와대와 여당은 백 장군 별세에 애도 성명 한 줄 내지 않았다. 국군 통수권자인 문재인 대통령도 조문하지 않았다. 미국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는 공식 트위터 계정을 통해 "한국은 1950년대 공산주의 침략을 격퇴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친 백선엽과 영웅들 덕분에 오늘날 번영한 민주공화국이 됐다"고 애도했다.

NSC는 공식 소셜미디어 계정에 '부산에서 판문점까지, 한국군 최초 4성 장군의 전시 회고록'이란 제목의 백 장군 영문 회고록 표지 사진도 올렸다. 청와대가 하지 않은 영웅의 추서를 동맹국인 미국 백악관이 해준 것이다.

많은 나라는 조국을 지키기 위해 헌신한 영웅들, 조국을 대표해 동맹국에 기여한 이들의 명예로운 죽음을 극진히 대한다. 1964년 6월 작고한 2차대전과 6·25 영웅 프랑스의 몽클라르의 장례식은 당시 대통령이었던 샤를 드골이 주관했다. 제복을 입은 대통령과 국방장관, 보훈처장 등이 그의 마지막을 배웅했고, 후배 군인들이 그의 관을 운구했다.

1976년 4월 작고한 2차 대전의 분수령이 된 이집트 알라메인 전투에서 독일군을 대파한 영국 육군 원수 버나드 몽고메리 장군의 장례식도 영국 윈저의 세인트 조지 예배당에서 영국군 군장(軍葬)으로 치러졌고, 1980년 그의 동상은 국방부 앞에 세워졌다.

1964년 세상을 떠난 미국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장례식은 시민 10만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국장으로 거행됐고, 1945년 독일에서 작고한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영웅 조지 패튼 장군의 장례식에는 프랑스·벨기에 등 8국 사절과 유럽 주둔 미군 최고위 간부들이 참석했다. 이러한 선진국가들의 전쟁 영웅에 대한 예우에 비하여 6.25 전쟁 구국 영웅을 너무 홀대하는 대한민국 정부의 태도에 대하여 염려하는 지식인들이 많은 것을 보는 것은 안타깝다.

7. 국가가 영웅을 홀대하니까 시민들이 분향소를 만들었다. 서울시는 이 분향소를 불법천막으로 취급하여 변상금을 물렸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지난 7월 13일 장맛비가 내리치는데도 광화문 광장에 마련된 '6·25 영웅' 백선엽 예비역 대장의 시민분향소에는 추모객들이 긴 줄을 섰다. 추모객들은 예상 밖의 긴 줄에 서로 놀라면서도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이 분향소는 정부가 아니라 청년 단체인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신 전대협)'가 앞장서고 예비역 단체 등이 힘을 모아 차린 것이다.

시민분향소는 지난 10일 향년 100세를 일기로 별세한 백 장군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려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자발적으로 찾아온 10만명 국민이 헌화했다고 한다. 자발적인 시민들의 백장군에 대한 추모의 마음이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발전시키는 초석이자 국가안보의 근간이다.

그런데 장례식이 끝난 후 서울시는 7월 21일 330만원 변상금을 추최측에 부과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이런 정부가 과연 자유민주국가를 지킨 영웅을 바르게 추모하고 기리는 정상적 국가라고 할 수 있는가?

8. 구국의 영웅이 서울 동작동 현충원에 묻히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문재인 정부는 백 장군을 12만 6.25 전우가 잠든 서울 현충원에 모셔야 한다는 각계 요구도 무시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백선엽 같은 장군이 아니라 남침공로로 북한에서 중용된 인물 김원봉을 “국군의 뿌리”라고 했다. 그러니 집권 여당은 백장군의 별세에도 애도 논평 한줄 내지 않은 것은 무지의 소치만이 아니다. 오히려 집권 여당은 백선엽이 일제강점기 20대 초반 나이에 간도특설대에 배치됐다는 이유만으로 '독립군 토벌 친일파'로 낙인 찍어 매도하려 한다.

국가보훈처는 지난 15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된 그를 '친일반민족행위자'라고 이튿날인 7월 16일 홈페이지에 명시했다. 정부가 '육군장(葬)'으로 백 장군을 모신 지 하루 만에 친일파로 낙인찍은 것이다. 이는 실로 반일종족주의 이념에 치우쳐 국가의 영웅을 모욕하고 그를 기리는 국민의 존경심을 훼손하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백선엽이 근무한 1943년 무렵에는 독립군 부대 대부분이 만주를 떠나 러시아로 이동했다. 1930년대 중반을 넘기면서 만주는 일본의 강력한 관동군 통제 아래에 들어선다. 따라서 흔히 말하는 무장 항일은 거의 구경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중공군과 싸웠고 독립군은 구경도 못했다"는 백선엽 자신의 증언은 들으려 하지 않는다.

'명분과 의리'를 들이대며 친일(親日)과 부역(附逆)의 굴레를 그에게 뒤집어씌운다면 당시 일본 통치하에 남아 수도·전기·토목·군사·산업 등 모든 영역에서 일본의 역량을 학습하며 제 가정을 이뤄 오늘의 대한민국 정체성을 이룬 대다수의 한국인을 모독하는 일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모든 분야에서 일본인보다 앞서는 사람이 존경스러운 애국자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자유민주국가 대한민국을 세우는 데는 진보 보수 이념을 넘어서서 온국민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 이것만이 우리나라를 부강하고 건강한 나라로서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길이다.

9. 우리 군과 국민들은 그분의 자유민주와 한미동맹의 유지를 잘 받들어야 한다.

에이브럼스 주한미군사령관을 동반하여 박한기 합참의장은 백장군을 고인을 추모한 후 언론 취재진에게 "장군은 풍전등화의 대한민국을 구했고, 평양 입성을 선도한 지휘관이었다"며 "장군의 뜻을 이어받아 확고한 군사대비태세를 유지하겠다"고 말했다. 오늘날 대한민국 국군들은 그 정신이 너무 해이해졌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는 집권당이 주적을 없앤 데서 생긴 것이다.

우리는 피를 나눈 북한 동포와 공산 이념의 북한 정권을 구별해야 한다. 북한 주체정권이 한반도공산화 이념을 갖고 6.25전쟁을 일으켜 수백만의 인명이 목숨을 잃은 민족의 비극이 발생한 것이다. 북한 정권이 핵과 주체 이념으로 한반도 적화통일 및 남한 공산화 정책을 버리지 않는 한 북한 정권은 우리의 주적으로 남아 있으며 우리는 한미동맹을 주축으로 안보를 튼튼하게 하여 이 나라를 굳건하게 지켜야 한다.

백선엽 장군은 “중국을 믿지 말고 한미동맹을 지켜라”고 우리들에게 유지(遺志)를 남겨주고 있다. 우리는 그의 유지를 받들어 자유민주 대한민국을 길이 보전해야 한다.

샬롬을 꿈꾸는 나비행동  출처 :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33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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