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청년은 군부는 오래 못 간다고 내다 봤다. 자신은 아버지와 같은 길을 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당시 필자는 그들을 돕는 사역을 했다)
과거 양곤 대학교는 미얀마의 선구적인 주요 대학 중 하나이며, 문학부, 과학부, 법학부 등의 여러 학부로 구성되어 있었다. 1996년의 군사 쿠데타에 저항한 학생운동 이후로 정상적인 학사학위 프로그램은 제공되지 않고 있다.
만달레이 대학교가 양곤대학교에서 1958년 독립되기 이전까지 미얀마의 모든 고등교육기관은 양곤대학교의 지휘를 받았다. 1964년 대학교육법이 발효된 이후, 문학부와 자연과학부, 법학부를 제외하고 이외의 학부는 독립 대학교가 되었다.
양곤대학교가 1878년(143년전) 설립 이래로, 개혁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1920년, 1936년, 1938년의 대부분의 반-영국운동은 이 대학교에서 시작되었다. 아웅 산, 우 누, 네 윈, 우탄트와 같은 반-영국운동의 지도자들은 이 대학교의 동문들이다. 이 학생운동의 전통은 1962년, 1974년, 1988년, 최근의 1996년 2021년과 같은 반-군부 민주화운동에 까지 그 맥이 이어지고 있다.
영국이 인도와 미얀마를 지배하던 시절, 인도의 콜커타 대학교의 분교로서 1878년에 설립된 랑군(양곤)대학은 침략자 영국에 의해 설립운영되었다. 랑군대학은 식민정부가 교육기관들을 관리하기 위해 조성한 '교육차관'으로 설립되었다.
1904년에는 '정부대학(국립,Government College)'으로 개칭되었고, 1920년에는 세속적인 정부대학과 침례교 신학교(미얀마는 장로교 교세는 약하며 침례교 교세가 강함)인 저드슨대학(Judson College)이 통합되면서 종합대학이 되었다.
2021년 현재 양곤 인센지역에 있는 침례교 계열 Myanma Institute of Christian Theology (MICT)는 1836년에 성경학교로 시작한 미얀마에서 가장 역사가 깊고 권위있는 신학교이다. MICT 대학은 학부생 수가 3000명 정도이다.(기자는 이 학교를 수차례 방문했고, 교수 한 명을 시무교회의 후원으로 한국에서 Ph'D 공부를 하게 했다)
이러한 통합의 과정에서 한동안 미얀마에 살고있던 미국인 침례교도들은 저드슨대학을 랑군대학교의 독립된 교육기관으로 간주했다. 랑군 대학교는 자신들의 이상향으로 케임브리지 대학교와 옥스퍼드 대학교를 생각했다.
이 시기에 영국에 의해 설립된 상당수의 고등교육기관(대학)들은 랑군대학교의 통제를 받았으며, 이처럼 랑군 대학교의 통제를 받은 기관은 1925년 설립된 만달레이대학교, 1930년에 설립된 양곤사범대학(현 양곤중앙교원연수원)과 양곤의학대학, 1938년에 설립된 만달레이농학전문학교(현 예진농업대학교)가 있다.
양곤대학교에는 당시 버마의 최고 엘리트들이 입학하는 학교인 동시에, 격렬한 반-식민 활동의 중심지였다. 영국의 식민지배에 항거한 1920년, 1936년, 1938년의 세 번에 걸친 반-영국 투쟁도 랑군 대학교에서 시작되었다.
1930년대를 거쳐 랑군대학교는 버마민족주의의 모태가 되었으며, 아웅 산, 우 누, 우 탄트와 같은 버마와 독립과 이후 미얀마의 유명한 정치인들을 길러냈다.
1940년대와 1950년대에 걸쳐 랑군대학교는 동남아시아 최고(最古)대학, 아시아 최고(最高)대학의 반열에 들었다. 이 당시 세계 여러 나라에서 많은 학생들이 양곤대학에 유학을 왔다. 한국의 해방 5년전부터 1950년 6,25 한국전쟁 발발무렵의 양곤대학의 위상 기록이다.
랑군 대학교는 원래 교수 및 학자, 교직원의 위원회(이사)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1962년 군부가 '버마식 사회주의'의 정책아래과 군부 네 윈(장군)의 사회주의 정부가 들어서자 중앙정부기관인 고등교육위원회가 랑군대학의 자율권을 빼았고 통제하게 되었다.
랑군 대학교는 설립 이래 영어를 교수용어로 강의를 하고 학생은 영어로 질문하고 영어로 리포트를 써내는, 당시로는 먼저 온 글러벌 대학이었다. 군부의 고등교육위원회가 랑군대학을 통제하면서 모든 교수 용어와 교육교재가 버마어(국어)로 바뀌었다. 군부는 점직적으로 고급인재양성을 우민화정책으로 바꿔나갔다.
이로써 랑군대학교 교육수준은 급격히 저하되었으며, 이전에 쌓아올린 명성도 무너지기 시작했다. 1964년 랑군 대학교에서 여러 학부가 독립된 이후 랑군 인문,자연과학대학교로 개칭되었다.(군부는 우민정책을 썼다)
1962년 7월 7일 랑군 대학교의 학생들은 평화로운 시위를 통해 군부의 '부정한 대학 통제'에 저항했다. 이 시위에 대하여 '네 윈' 군부정권은 학생들의 시위를 강제 해산하기 위하여 양곤학교에 군대를 파견했다. 이 군대의 총격으로 인해 많은 학생들이 사망하였다. 진압에 투입된 군대는 다음날 아침 랑군대학교 학생회관 건물에 발포했다. 그곳에는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또한 길거리 시위자와 호수로 뛰어드는 시위자에게 발포하여 호수물이 붉게 물들었다 증언을 직접 들었다.
1974년 11월 UN사무총장 우탄트(버마인)가 사망하자 그의 장례식이 12월 5일 그의 모교 양곤대학에서 있었다. 국장(國葬)으로 치루어진 이 장례식에서 학생들은 경의를 표하지 않는 국가권력에 저항함을 드러내기 위하여 영구 중이던 관을 빼앗아 학교 인근 카이카라이 도로에서 자체적으로 장례를 치른 뒤 대학교 내 마련된 임시 빈소에 관을 안치 해 두었다.
12월 11일 군대가 캠퍼스에 진압하여 저항하는 학생들을 총살하고 관을 원상태로 했다. 이후 우 탄트는 슈웨다곤 파고다(양곤의 상징 황금 탑) 밑에 묻혔다. (편집자 주) 당시 군부가 사살한 양곤대학생과 시민의 정확한 사망자 수와 실종자 수는 밝혀 지지 않음, 군부는 시위자를 비디오 촬영하고 찾아 내어 사살하거나 실종되었다고 그후 현지에서 들었음 )
1989년 군사 쿠데타 이후 국명을 버마에서 미얀마로 변경했다, 미얀마는 버마족이 많지만, 다른 부족도 여럿이 있다. 이와 함께 랑군대학교의 이름도 양곤대학교로 바뀌었다. 군부는 양곤대학교 학생들이 연합하여 8888 항쟁을 일으키자 재발을 우려하여 1990년대 대부분의 대학을 사실상 폐쇄했다.
양곤대학 컴퍼스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학사를 지방 오지로 흩었고, 학점을 까다롭게 관리하여 열악한 환경에서 공부를 하든가 퇴학을 선택하라는 정책 이었다. 이 무렵 미얀마 젊은 층이 싱가포르, 태국, 일본, 한국 등으로 출국하여 훗날을 기약했다. 한국에 들어와 불법 취업(관광비자로 들어와 공장에 취업 하던 시절) 했던 한 청년은 군부지도자의 아들도 있었다.
그 청년은 군부는 오래 못 간다고 내다봤고 자신은 아버지와 같은 길을 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당시 필자는 그들을 돕는 사역을 했다)
오늘날, 양곤대학교는 정부(군사)에 의해 비정상적이 되었다. 현재, 양곤대학교 메인 캠퍼스에는 대학원 수업과 특정한 전문가 과정, 졸업수업만이 이루어질 뿐이다. 학부수업은 양곤시 외부로 분산된 다곤대학고, 동양곤대학교, 서양곤대학교에서 이루어진다.
2021년 2월1일 미얀마 군부가 또 쿠데다로 선거에 의해 정당하게 주어진 민정권력을 빼앗아 권력을 장악하자 대학생들과 교수, 침례신학교 학생 및 교수 및 의료인과 통신사 직원 판사 검사 시민 등이 반 쿠데다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양곤과 만달레이(제2도시/왕국) 등에서 시위 규모가 커지고 있지만, 군부가 시위진압을 위해 무력을 사용했다는 현지 지인의 소식은 아직 없으며, 인터넷은 군부가 차단했다가 다시 사용하도록 했으나 느리고 끊긴다는 소식을 9일 0시에 양곤 지인으로부터 페이스 북 메시지로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