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죽는 날 받아 놓았다지? 종말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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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죽는 날 받아 놓았다지? 종말의 승리
  • 박동현 기자
  • 승인 2021.05.04 19: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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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게 끌려가는 삶의 시간들이 아니라, 오히려 내 쪽에서 죽음의 의지와 상관없이 죽음을 끌어당겨 내 앞에 굴복시키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죽음을 향하여 "사망아! 너의 승리가,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라고
삶의 멈춤이 가까워 보이는 나이의 할머니 

사람의 수명이 길어지고 의학이 발달하지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삶의 과정이다. 나이 들면서 아름답고 건강한 인생을 꿈꾸며 well-being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well-dying 임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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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말이 그렇지, 막상 과연 어떻게 죽는 것이 '잘 죽는' 것인지를 설명하라면 애매모호한 말로서 끝을 흐릴 뿐이다. 인생을 아름답게 표현함에 있어 죽는 것이 최상이요 최선의 선택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누가 뭐래도 죽음은 최악이다. (믿는 사람들은 천국환송 찬송을 부르지만, 가족과의 이별은 슬픈 일 아닐 수 없다)

내가 언제 어떤 모습으로 죽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는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이다. 내 인생이 아무리 화려한 삶이었다 할지라도 말년에 비참하게 되어 비극적 종말을 맞는다면 이는 분명 가장 애석한 일이다. 그러기에 인생은 종말이 중요하다. 여기에 우리가 웰-다잉(잘 죽자)을 외치는 이유가 있다.

어느 노인요양원에서의 예배가 끝난 후 원장의 부탁으로 특별실(?)에 마련된 김 할머니(93)를 개인적으로 찾아뵈었다. 앙상하게 뼈만 남아 홀로 침대에 누워 있는 그녀 곁에 앉아 나(글임자)는 나대로 깊은 상념에 빠져 있었다.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사실 딱히 할 이야기도 없다. 그저 그녀 곁에 앉아 그녀의 야윈 손을 잡아주고 그녀 곁에 내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무언으로 알려 줄 뿐이다. 한참을 침묵 속에 있다가 놀랍게 그녀가 입을 연다.

"난 영광(전남) 사람이야. 큰 아들은 죽고, 둘 째 아들이 00 대학 영문과 나왔어 날 여기 요양원에 데려다 놓고 딱 두 번인가 와보고 다시 안 와. 자식놈들 키워놔보아야 다 필요 없어!" 영광이 집이요 고향인 김 할머니는 여전히 고향집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말없이 그녀 곁에 앉아 있는 동안 녹음기를 돌리듯 위의 말만을 되풀이 하였다.

영광이라는 지역 명을 내세워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였고, 00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는 아들의 학력을 내세워 자신의 지난 삶이 오로지 자식의 성공을 위해 희생되었다는 것, 그리고 결론적으로는 요양원에 어미를 쳐 박아 놓고 찾아보지도 않는 자식들에 대한 서운함의 원망이 전부였다. 그야말로 영광의 상처요, 상처뿐인 영광이다.

죽음을 맞이 할 노인들의 의견

그녀의 푸념 섞인 넋두리를 들으며 곁에서 거들어 한 마디 했다. "정말 나쁜 싸가지 없는 자식 놈들이네요. 그런데 어쩌겠어요? 고우나 미우나 내 자식들인 걸 어떡해요? 자식 놈들이야 어차피 그렇다 하지만, 어머니는 끝까지 그런 자식 놈들을 사랑하니까 부모지요.

하나님 아버지도 그래요. 자식들인 우리가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기에 끝까지 우릴 사랑하십니다. 때론 세상 부모도 버릴 때가 있지만 하나님 아버지만은 자녀인 우리들을 절대 버리지 않으시는 좋은 아버지이시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요~."

늙고 병들어 초점을 잃은 멍한 시선과 무표정한 얼굴 그리고 힘없이 어깨를 떨군 채 세상을 향해 아예 눈을 감아버린 저들을 향해 천국 영생의 예수 소망 이외에 그 이상 무슨 말을 해줄 수 있겠는가?!

나는 그녀의 침대에 머리를 묻고 나 혼자만의 독백처럼 답답한 마음으로 울면서 기도했다. 인간의 종말이 모두 이와 같지 않은가. 누구나 이런 과정의 길을 걷는다. 나도 그럴 것이다.

인간의 초라한 말로를 바라보면서 나 역시 땅 속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절망의 순간을 체험하지만, 역설적인 것은 바로 이 시점이 새로운 소망의 출발점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시점이야말로 인간의 무력함을 다시 한 번 깊이 깨닫고 아주 겸손히 주님 앞에 나와 도움을 구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고, 이 때 주님의 임재를 확신하게 되며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에,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에 감사하게 되기 때문이다.

얼마 전 벽제 동광원에 갔을 때 심 교수가 선물로 주었던 다석 유영모 선생의 시집 <죽는 날 받아 놓았다지?>를 읽어보는 중에 첫머리부터 흥미 있게 읽어보게 된 것은 책 제목대로 1890년생의 다석이 자신의 죽는 날을 기도하고 기도해서 1956년 4월 26일로 스스로 못 박아 정해놓고 그 시점의 1년 전부터 일기 형식의 시를 써내려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가 죽은 것은 예정된 죽음일보다 25년을 더 산 1981년이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가 죽는 날을 받아 놓은 후부터는 그 날을 사모하며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죽고 싶지 않은 상태에서 억지로 강요된 죽음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스스로 선택한 죽음의 개념 때문일까? 나도 그럴 수 있을까 ?

이런 방식대로라면 한국죽음학회에서 강조하는 '당하는 죽음이 아니라 맞이하는 죽음'이 웰다잉의 실제적 방법론일 수 있다. 찾아오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기다리는 일이 되겠기에 새로운 관점이 형성된다.

죽음에게 끌려가는 삶의 시간들이 아니라, 오히려 내 쪽에서 죽음의 의지와 상관없이 죽음을 끌어당겨 내 앞에 굴복시키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죽음을 향하여 "사망아! 너의 승리가,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라고

큰 소리로 호령하며 예수 믿음의 승리를 외쳤던 그 용기와 담대함을 직접 체험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종말의 승리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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