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 기다림 앞에서.. 정선희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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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번째 기다림 앞에서.. 정선희 사모
  • 박동현 기자
  • 승인 2022.01.13 14: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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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형편을 아신 하나님께서 때마다 힘듦을 미리 살펴주시고 필요를 미리 채워주셨습니다. 남편이 얼마나 힘 들었을까 생각해 본다. 때로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때로는 안쓰러운 마음으로 지켜보며 살아왔다.
누구 하나 알려주지 않고 누구에게 물어볼 수 도 없는 상황 속에서 숨죽이며 기도했다. 때로는 눈물도 흘렸다. 뒤돌아보면 하나님의 세심한 손길과 보호 아래 목회자의 아내의 길을 걸어왔다고 생각한다. 아,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아닐 수 없다.
필자 정선희 사모는 부군 조재호 목사(위임)와 고척교회를 섬기고 있다. 사진제공 정선희 사모  
필자 정선희 사모는 부군 조재호 목사(위임)와 고척교회를 섬기고 있다. 사진제공 정선희 사모  

모태신앙인인 나와 무교 가정에서 성장한 남편이 만나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길을 걸어오며 희로애락을 함께 경험했다. 그 시간 속에서 나는 어떤 아내요, 어떤 어미요 어떤 사모 였을 까? 사모라는 호칭이 익숙해지기까지 꽤 많은 세월이 걸린 듯한, 빔틈 많이 보이는 목회 동반자 였던 나의 삶을 스토리를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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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9월 우리 네 가족은 경기도 의정부에서 지금의 서울 고척동이라는 새로운 터전으로 이사를했다. 남편이 고척교회 전임전도사 사역으로 부름받았 기 때문이다. 처음 들어본 동네 이름이 매우 낯설었다.

교회 적응도 잘 안 되었는데, 누군가가 ‘사모님’이라고 부른다. ‘누구 어머니’라고 불리는 것이 익숙하고 편했기에 ‘사모님’이라 부르는 소리가 처음에는 나를 부르는 소리인 줄 미처 몰랐다. 고척동에서의 새로운 생활은 그렇게 어색하게 시작되었다.

삶의 터전을 옮기게 한 새로운 부르심

남편은 대학 졸업 후 국방 관련 연구소에서 5년간의 근무를 마치고 새로운 인생 계획을 품었다. 만3살 짜리 아들을 데리고 미국 유학길에 오른 때가 1983년 여름이었다. 남편은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교 (NCSU)에 입학하여 장래의 꿈을 펼쳐나갔고, 필자(정선희)는 미국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었다.

석사학위를 받고 난 즈음에 남편은 하나님의 부르심(Calling)이 자신에게 들려오는 것 같다는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몇 개월 동안 그 부르심 앞에 정말 그러한가 기도하며 힘겹게 씨름하던 남편을 지켜보며, 필자도 같이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를 반년. 남편의 얼굴이 달라졌다. 부르심을 확신하고 하나님 앞에 응답한 것이다. 응답은 했으나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남편을, 출석하던 교회 담임 목사님께서 앞장서 도와주셨다. 버지니아 유니온신학교의 입학을 허락받고 다시 리치몬드로 삶의 터전을 옮기게 되었다. 크지는 않지만, 고풍스러운 신학교가 우리를 반겨 주었으나 가정살림은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신학교에서 학비를 지원해 주기는 했어도 여느 유학생 가정처럼, 필자는 넉넉하지 못한 살림에 보탬이 되기 위해 베이비시터, 하우스키퍼, 등으로 일하며 이리저리 뛰어 다녔다. 

공학도였던 남편에게 신학은 공부방식이나 그 내용이 너무 달랐던 모양이다. 책도 많이 읽어야 하는데 시간이 턱없이 모자라 힘들어 했다. 남편은 그 와중에도 학교 도서관에서 아르바이트를하며 살림살이를 도와 주었다.

필자는 날로 커가는 아이들 뒷바라지와 여러가지 일을 해 내느라 여유가 없었고, 남편이 학교에서 시에 들어 와 자는지도 몰랐다. 남편은 신학생과 교육전도사라는 새로운 타이틀, 필자는 교육전도사 부인, 유치부 사라는 어색한 호칭을 갖게 되었다. 여전히 현지언어가 익숙하지 못했지만, 이렇게 시작된 교회사역과 가정의 일을 감당하게 된 것은 기대감과 스트레스를 동시에 가져왔다.

다시 한국에서…

그렇게 5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면서 남편의 인생 진로가 바뀐 것을 한국 가족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에서 태어난 둘째를 안고 여름 방학을 이용하여 우리 네 가족은 설레는 마음으로 잠시 귀국 했다. 그리운 부모, 형제, 친구들, 맛있는 음식들, 오랜 만의 편안한 쉼이 꿈만 같았다.

그러나 그 달콤한 시간이 다 지나기도 전에 다시 출국 과정을 밟다가 서류 착오로 그만 발이 묶이게 되었다. 미국 영사관에서 재 입국 비자 발급이 거부되면서 우리 가족의 삶은 하루 아침에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하나님, 이 일을 어떻게 하면 되나요? 삶의 터전이 미국에 있고, 부름받은 곳의 학업도 미국에 있는데, 남편과 우리 가족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 후 1년 6개월의 시간은 길을 찾는 시간이었고, 결코 만만치 않았다. 모든 살림과 일을 잠시 두고 온 필자는 물론이고 신학 공부를 중단하게 된 남편의 허망함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버스 차창 너머 먼 산을 바라보며 눈물 닦아내는 그의 모습도 훔쳐보았다.

우리는 형제들이 급히 마련해 준 돈으로 전셋집이 싼 서울 외곽 의정부, 그곳에서도 의정부의 외곽인 녹양동에 거처를 얻게 되었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은 여전히 우리를 인도하셨다. 남편은 당시 녹양교회 목사님의 도움을 입어 1988년도에 장로회신학대학교 신대원에 입학했다.

다시 교육전도사로, 필자는 그 옆에서 교육전도사 사모로, 우리 아이들과 함께 서 있었다. 낯선 동네에 정감이 가는 크지 않은 녹양교회에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달란트에 따라 성가대 지휘도 하고, 구역장까지도 소화해 내면서 경제적인 도움을 고자 피아노 개인교습도 하러 다녔다. 교회와 동네에 정을 붙이며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다.

필자는 가정에서는 남편의 아내이자 아이들의 엄마로, 가정에서 부로 열심히 자리를 지키려고, 부족하지만 열심히 살았다. 있는것 아껴 쓰고 부족한것 아쉬워하지 않았다. 남편의 마음이 안정되면서 파트 교육전도사였지만, 전 임처럼 교회를 출입했다. 우리에게 다시 가정과 교회의 행복한 동거가 시작된 것이다.

조재호 목사와 정선희 사모, 가족. 사진제공 정선희 사모
조재호 목사와 정선희 사모, 가족. 사진제공 정선희 사모

아내로, 엄마로, 사모로

필자는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했다. 할아버지께서는 젊은시절 일찍이 어느 외국 선교사님 사역과 연관되셨었다. 그 후 교회의 안수집사로 헌신하셨고, 친정 집안 전체가 기독교적인 분위기였다. 그러나 남편의 가정은 전적인 무교였다. 남편은 신대원에 다니면서 평상시에도, 신앙인 부모님의 기도가 없는 것, 형제들의 격려와 응원이 없는 것을 무척 아쉬워했다. 그런 까닭에 처가의 기독교적인 분위기와 배려를 늘 고마워했다.

필자는 남편이 목회의 길에 접어들면서 얼핏 얼핏 ‘목사 가정은 이래야 하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혼 전부터 사모의 자리나 목회자의 가정을 한 번도 생 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늘 현재 주어진 자리에서 살아 가면서 뒤늦게 깨닫고 배우고 기도하는 세월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내 안에 가정에서의 주부와 교회에서의 사모의 생각이 언제나 혼재되어 있었다고나 할까. 아이들을 말씀의 훈계에 따라 믿음의 자녀로 양육하려고 노력했지만, 교회의 사모가 아니라 아이의 엄마로 다가 간 것이 뒤돌아보니 아이들 교육과 성장에 도움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남편은 교회에서의 목회 사역이든지 교회 밖에서 맡겨진 일이든지 무슨 일을 하면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나로서는 때로 맞춰주기 버겁지만, 어떨 때는 자녀들보다 남편이 우선이었다.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

아이들이 큰 혼란이나 어려움 없이 균형 잡히게 잘 자라준 것이 너무 고맙고 대견스럽다. 하나님께서 내 형편을 아시고, 내가 힘들어하는 것들을 미리 치워 주시고, 필요한 것을 미리 채워주셨다고 고백한다.

남편은 고척교회에서 2년 전임전도사 사역 후 1993년 4월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해 10월 김제건 담임목사님은 원로목사로 추대되셨고 남편은 위임목사로 임직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27년 동안 고척교회를 섬겨오고 있다.

남편은 교회의 일이나, 당회 회의 등 많이 경험하지 못한 채 작지 않은 규모의 교회를 섬기게 된 것이다. 매사에 꼼꼼하고 세심한 성격의 남편이 갑자기 모든 걸 물려받았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해 본다.

때로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때로는 안쓰러운 마음으로 지켜 보며 살아왔다. 누구 하나 알려주지 않고 누구에게 물어 볼 수도 없는 상황 속에서 숨죽이며 기도했다. 때로는 눈물도 흘렸다. 뒤돌아보면 하나님의 세심한 손길과 보호 아래 목회자의 아내의 길을 걸어왔다고 생각한다. 아,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아닐 수 없다.

고척교회 전경
고척교회 전경

내 인생의 교회들

지금까지 필자는 6개의 교회에 다니며 섬겼다.

첫 번째 교회는 결혼 전까지 다니던 홍제교회다. 중고등부 시절 학생회를 통해서 순수한 10대의 열정을 수줍게 보여주었던 교회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했던 아름다운 공동체였다.

두 번째 교회는 결혼 초에 다니던 새과천교회다. 첫 아이 손 붙잡고 가정의 소중함을 깨달으며 전도에도 힘썼던 추억상자였다. 교회가 상가에 위치했으나 뜨거웠던 교회, 힘들었지만 그래서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교회였다.

세 번째는 유학생 시절에 반찬을 나누며 은혜의 교제를 꽃 피웠던 아름다운 듀랄리한인장로교회이다. 기도와 헌신의 자리를 배웠던 교회이고, 남편이 목회자의 소명을 확인했던 교회이기에 더욱 잊지 못한다.

네 번째는 신학생시절 교육전도사로 교역자의 첫발을 내딛었던 리치몬드한인중앙교회다. 낯선 곳에서 우리가정의 사명을 품어 주었던 고마운 교회였다.

다섯 번째는 의정부에 위치한 녹양교회다. 갑작스러운 한국 정착의 심리적 어려움 속에서 남편과 세 가족이 따뜻한 관심을 받으며 행복했었고 열심을 냈던 교회 였다.

마지막 여섯 번째가 지금의 고척교회다.

남편은 긴세월 동안 큰 공동체에서 말씀 붙잡고 달려왔다. 필자는 가정의 주부로, 목회자의 아내로, 교회에서는 사모로 불렸던 곳이다. 남편을 지켜보며 함께했던 사랑과 소명의 정착지였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사랑을 받았고, 교우들이 보내준 관심의 손길 아래서 두 자녀가 성장하여 가정을 이루었다.

이제는 부르심의 감사와 헌신의 고마움을 뒤로 하고 은퇴를 한 해 앞두고, 잊지 못 할 소중한 추억들을 모아서 보따리를 쌀 준비를 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낮은 자리에서 착한 성도로 겸손하게 섬겨나갈 일곱 번째 교회를 기다리고 있다.(편집자 주) 조재호 목사는 65세 조기은퇴를 하며, 교단 헌법상 5년을 더 목회 할수 있다.

교회는 필자에게 신앙의 모태였고 성장의 발판이었다. 교회는 힘들 때 위로받는 포근한 곳, 은혜로운 말씀의 향연을 만나는 곳, 감사와 기도 찬양으로 올려드리는 곳이었고, 가정과 교회는 내 삶의 전부였다. 부족한 우리 가족을 지긋한 사랑으로 함께해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글 사진 정선희 사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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