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북한산에 얽힌 우리들이야기 오세열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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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북한산에 얽힌 우리들이야기 오세열 교수
  • 박동현 기자
  • 승인 2022.11.20 18:3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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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성은 숙종 때 대대적인 축성공사를 거친 산성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유사시를 대비해 마련한 산 속의 도성이다. 유사시 왕의 피난처였고 신변을 지켜줄 요새였으며 도성주민과 함께 외적에 맞설 항전지였다.
북한산 백운대
북한산 백운대

외국인들은 대도시 지하철을 타고 바로 유명한산에 오를 수 있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한국 밖에 없다고 극찬한다. 북한산이 그렇고 관악산이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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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은 조선시대 5대 명산 중 하나였다. 북으로 백두산과 묘향산, 금강산이 있고, 남에는 지리산과 북한산이 오악(五嶽/한국5대명산)에 들어간다.

수려하기로 따지자면 설악산이 북한산보다 한수 위지만, 오악에 들지 못한 것은 금강산에서 이어지는 산등선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殊常)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삼각산은 서울의 중심되는 산으로 북한산의 옛 이름이다.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 세 봉우리가 빼어나서 삼각산이라 불린다. 병자호란 때 김상헌은 끝까지 청나라를 대항해 싸울 것을 주장한 '주전파'였다.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한 달 가량 항전하다가 삼전도(三田渡 서울 송파구 삼전동에 있던 한강 상류의 나루)로 나와 청태종 홍타이지를 향해 세 번 절하고 땅에 머리를 아홉 번 찧는 수모를 당하고 항복했다.

청태종이 높은 단위에 앉아 있고 그 옆에 도열한 청나라 장수들은 인조가 머리를 찧을 때 소리가 나도록 세게 찧으라고 소리쳤다. 곧 인조의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김상헌은 소현세자와 봉림대군과 함께 볼모로 청나라에 잡혀가게 되었는데 이때 애국충정에 북받쳐 이 시를 지었다. 남한산성에서 항전하던 인조가 청나라 태종에게 무릎을 꿇은 역사적 사실로 인해 후대 국왕들은 도성을 외곽에서 방비할 수 있는 다른 장소를 모색하게 되었다.

그것이 북한산성이다. 북한산성은 숙종 때 대대적인 축성공사를 거친 산성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유사시를 대비해 마련한 산 속의 도성이다. 유사시 왕의 피난처였고 신변을 지켜줄 요새였으며 도성주민과 함께 외적에 맞설 항전지였다.

고려 7대 목종의 생모 천추태후는 왕이 어리다는 이유로 수렴청정을 자처하고 나섰다. 천추태후는 외간남자 김치양과 불륜관계를 맺고, 마음대로 정사를 주무르고 있었다.

이들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차기 국왕으로 만들기 위해서 태조 왕건의 손자로서 정통성을 가진 대량원군을 제거하려는 음모가 시작되었다. 이를 위해서 대량원군을 삼각산 깊은 산중의 암자로 쫓아냈다.

자객을 보내 암살을 도모했으나 주지인 진관대사는 3년동안 방안에 땅굴을 파고 대량원군을 숨겨두었다. 대량원군은 8대 현종으로 등극했다.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 자신이 숨어 살던 땅굴을 ‘신의 동굴’(神穴)이라 불렀다.

그 자리에 진관대사의 이름을 따라 진관사를 건립했다. 진관사는 서울근교의 4대 사찰의 하나로 서울 은평구 삼각산 자락에 있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북한산에 있는 덕방암과 인근사찰의 승려들이 성균관 유생 26명을 폭행과 절도죄로 고소한 사건이 나온다. 세종24년(1442년) 성균관 유생들은 늦더위를 식힐 요량으로 녹음이 짙고 계곡물소리와 새소리로 가득한 북한산 덕방암 골짜기로 유람을 떠났다.

북한산 계곡

당시 조정에서는 성리학이념을 내세우며 억불숭유정책(은 불교 교단의 세력을 강제로 축소시키고 약하게 유지하기를 목적으로 하는 조선의 주요 국가시책이다. 숭유(유교를 숭상함)라는 단어가 있지만, 포인트는 억불에 있음)을 시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왕실은 개인적으로 불교를 믿었고, 일반 민중가운데도 불교는 들불처럼 퍼져나갔다. 이러한 사회적 상황에서 북한산 난투극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성균관 소속 유생들은 산사 유람이 금지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단체로 북한산 사찰로 들어갔다. 이를 보고 있던 승려들이 북을 치고 소리를 지르며 유생들을 위협했다. 이에 유생들은 돌을 던져 승려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북과 염주를 빼앗아 달아났다.

한쪽은 불도를 구하고 대중을 교화한다는 승려였고, 다른 한쪽은 인격을 수양하고 학문을 익히는 유학자이다. 이 난투극은 단순한 치기어린 행동이 아니라 당시 승려들의 불교억압정책에 대한 반감으로 볼 수 있다.

북한산 지역이 학자들의 심신수련공간으로 이용되면서 북한산 사찰은 불교와 유교가 만나는 사상교류의 가교역할을 하였다. 한 예로 북한산 입구에 위치하는 도봉서원은 도학정치를 실현하고자 북한산 자락에 세워진 사당이다. 서원은 성균관, 향교와 함께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교육 기관이다.

다른 한편으로 유교기반 조선사회를 헤쳐 가야하는 불교계의 서글픔도 나타났다. 사찰과 선원이 유생들의 공부방이 되고, 승려는 이들의 시중꾼이 된 신세라는 자조섞인 말이 나오게 되었다.

한편 조선시대 북한산은 가난한 사람들이 목숨을 이어가는 삶의 공간이기도 했다. 한양에서 밀려난 유랑민과 도망친 노비, 그리고 죄지은 이들이 마지막으로 기대는 언덕이 북한산이었다. 조정에서는 이들을 거두기도 했지만 북한산 자락을 떠도는 가난한 이들의 발길은 쉼없이 이어졌다.

요즈음 ‘나는 자연인이다’ TV 프로그램이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다. 온갖 스트레스에 지쳐 가는 도시인이 산속에 들어가 가진 것 없어도 여유와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는 자연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당시 지금보다 더 울창한 숲과 계곡, 맑은 물, 그리고 자연이 주는 천혜의 북한산은 선비의 풍류계곡이 되면서도 아무것도 없는 사람에게는 먹을 것과 쉴 곳을 제공하는 삶의 터전이었을 것이다. 

필자 오세열 교수는 Midwest 대학원 리더십 교수이며 성신여대 명예교수, 목회학 박사(D.Min), 목사, 경영학박사(고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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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천 2022-11-21 01:44:21
이제는 역사적 사실과 고증까지
수고가 많으시네요~~♥

백봉기 2022-11-20 19:44:14
깊고도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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