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에 대한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세계이해와 인간이해의 대전제로서 교회 공동체 내부와 세속 사회 모두에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양식 전반을 규제한다. 신앙의 개인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는 계명에 대한 자율적 순종의 양태로 현실화된다. 그에 비해 신앙의 공적 차원인 교회 공동체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는 신자들이 일치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수여하신 법을 합심하여 준수함으로써 실현된다.
구약에는 율법이, 신약에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된 율법, 즉 복음이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위한 법으로 신자들에게 수여되었다. 흔히들 복음 안에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롬 3:24)가 담겨있다 하여 그 법적 속성을 쉽게 간과하곤 하지만, 사실 복음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계명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준수해야 할, 구약의 율법보다 더 온전하게 완성된 하나님의 법이다.
“값없이” 은혜가 주어졌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가 인간으로서는 도무지 그 값을 치를 수 없는 초월적 은혜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복음 속의 율령을 준수하는 믿음 없이 구속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은 본회퍼가 지적한 것처럼 “값싼 은혜” 를 향한 어긋난 바램에 불과하다.
이렇듯 하나님의 통치가 법적인 원리를 통해 실현되는 영적 실상은 세속 사회에도 ‘유비적으로 그 효력을 발휘한다. 세속 사회는 대개 죄로 인해 하나님의 법을 올바르게 인지하고, 준수할 능력을 상실한 이들이 주관하고 있다. 그러나 칸트가 올바르게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 속에 담긴 하나님의 형상은 희미하게나마 “거룩한 입법자” 하나님에 대한 예지(叡智)를 더듬어 찾을 능력을 부여한다.2) 그 결과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는 비록 여러 모로 왜곡되기는 했어도 세속 사회의 정치 및 사회원리에도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리고 세속 사회를 향한 이 유비적인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역시 주로 법률의 형태로 구체화된다.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의 중추적인 의의는 하나님께서 스스로의 사역에 몇 가지 불가능의 제한을 걸어 두셨다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은 존재적 차원으로 볼 때 불가능이라는 것을 찾아볼 수 없는 완전무결하신 분이다.
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으시는 절대적 자존성,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창조주로서 근원성,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을 헤아리고 파악하고 주관하시는 전지전능하심,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존재적 완전성을 지시한다.
이런 온전하심 덕분에 하나님께는 원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없지만 피조물을 향한 은혜의 뜻을 세우시면 서 스스로에게 여러 가지 제약을 가하신다. 이것을 가장 잘 정리한 개념이 중세 후기 신학자 오캄이 정립한 “하나님의 절대적 권능(potentia dei absoluta)”과 “하나님의 질서잡힌 권능(potentia dei ordinata)”이다)
창조와 구속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절대적으로 자유롭게 뜻을 세우실 수 있지만, 일단 그 뜻이 정해진 후로는 하나님 스스로도 그 뜻을 임의로 폐기하거나 무시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이 두 개념을 통해 강조되는 하나님의 성품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포함한 우주 만물에게 그분의 뜻을 계시하실 때 이 뜻은 언제나 명령 혹은 법의 형태로 전달되었다. 이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절대적인 존재적 격차 때문이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형상의 일환으로 자유의지를 행사할 수 있도록 인간에게 주신 기회 때문이기도 하다.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하나님 스스로도 그분이 정하신 법을 어기지 않으신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법적 질서를 부여하실 때는 언제나 하나님께서도 그 정해진 질서 안에서 그분의 권세와 능력을 나타내시는 신실함 성품이 전제되어 있다.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과 질서의 범위 안에서만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함의하는 바는 명확하다. 하나님 스스로도 절대 어기지 않는 이 지고의 법을 피조물인 인간이 임의로 어길만한 그 어떤 권리나 정당성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질서잡힌 권능 개념이 제시하는 필연적 함의다.
여기서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와 세속 권세자들의 자의적인 통치의 차이가 극명하게 갈린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나라를 통치하기 위해 세우신 법과 질서를 준수하면서 선(善)의 절대적 모범이 되시는 반면, 세속 권세자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권력 유지를 위해 쉽사리 법을 새로 제정하거나 개정할 뿐 아니라
자신들의 통치권을 뒷받침하는 법질서를 그들 스스로가 묵살하는 월권과 전횡을 자주 일삼는다. 이러한 차이는 세속 사회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방식을 고찰하는 데서 필수적으로 유념해야 할 사안이다.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의 특성,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그것이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에 서로 다른 형태의 법을 통해 이 땅에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는 구약 시대에는 율법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으로 이 땅에 펼쳐졌고, 신약 시대에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복음을 통해 전 인류를 향해 실현되고 있다.
그런데 율법을 통한 하나님의 통치와 복음에 의한 하나님의 통치의 연관성, 특히 양쪽의 유사성과 차이를 주의깊게 살펴보지 않을 경우 우리는 자칫 하나님의 신실하신 성품에 대해 심각한 오해를 범할 수 있다.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 대하여 가장 널리 퍼진 오해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을 일정부분 변역하면서 인류와 만물을 통치하신다는 잘못된 생각이다.
물론 성서는 하나님께서 절대 “변역지 아니하는”(말 3:6) 분이라는 것을 가르치지만, 실제 성서 연구 및 목회 현장에서 주의깊게 살펴본 경험으로는 이 가르침을 충분히 신뢰하지 않는 이들이 자주 목격된다.
이들이 가장 크게 오해하는 계명의 내용으로는 율법에 명시된 여러 제사와 절기의 폐지, 그리고 십일조와 십계명 준수의 의무를 예로 들 수 있다.
구약의 제사와 절기가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를 통해 완료된 사실에 대한 몰이해, 그리고 구약과 신약 시대 모두에 유효한 믿음의 법인 십일조와 십계명에 대한 무지가 신자들로 하여금 각 개인과 교회를 향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훼방하게 만든다.
이는 하나님의 뜻과 통치가 인류에게 펼쳐지는 방식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 신약의 복음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할 때, 우리는 이 말을 역사적 시간 순서에 따라 하나님의 뜻이 불완전하게 주어졌다가 그리스도를 통해 ‘비로소’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약 1:25) 혹은 “생명의 성령의 법”(롬 8:2)으로 완성되었다고 이해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것은 헤겔에 의해 정립된 근대적 역사관을 따르는 것으로서, 역사란 미숙하고 불완전한 인간 정신을 변증법적으로 변형시켜 가는 전 인류 차원의 진보적 운동이라는 생각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가르치는 계시의 역사는 진보를 말하지 않는다.
인류와 우주 만물 전체의 앞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이미 태초부터 완성되어 있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비로소 그 전모가 인류에게 드러나게 된 것일 뿐이다. 단지 구약 시대에는 인류가 죄로 타락해서 하나님의 통치를 온전히 수용할 만한 의식과 문화적 여건을 갖추지 못했기에 하나님의 뜻이 율법을 통해 부분적으로만, 그것도 많은 부분에서 유비적으로 전달되었을 뿐이다.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원리인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 즉 복음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덧붙여지거나 개정된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이미 그 전체가 하나의 완성된 법체계였던 것이다.
필자 박옥주 박사,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