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진 것이고는 아무것도 없다. 새해라고 하지만 해가 서쪽에서 뜨는 것도 아니고 남산과 관악산이 자리를 바꾼 것도 아니다. 얼굴을 가득 수놓은 주름이 눈 녹듯 사라진 것도 아니고 천억 재벌이 된 것도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새해라며 떠들고 다짐한다. 바뀐 것이 있다면 달력의 숫자판이 달라졌다는 것뿐이다. 새해의 의미를 거기서 찾는다면 허망한 되풀이를 거듭할 수밖에 없다.
새해를 새해답게 만드는 것은 사람이다. 역사도 교육도 문화도 정치도 사람이 만든다. 우리네 정치변동사를 들여다보면 새로운 정치를 표방한 사람들이 당명을 바꾸고 이합집산을 되풀이 하지만 달라진 건 단 하나도 없다.
이유는 사람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람이 변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좋은 쪽으로 변하기보다는 나쁜 쪽으로 변할 개연성이 더 크다.
동물원 사육사의 말이 떠오른다. “맹수라도 사육 방법에 따라 순한 양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사육사에게 덤비는 짐승은 천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하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덤비고 할퀴고 배신을 일삼는 사람보다 짐승 길들이는 것이 훨씬 쉽다”는 것이다.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힘, 사람을 바르게 하는 힘,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은 사람이 만드는 힘이 아니다. 그 힘으론 안 된다. 우린 여기서 변화의 강력한 동력이 무엇인가를 짚어야 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씀 속에 답이 있다. 그리스도는 사울을 변화시켰고 김익두를 변화시켰고 그리고 나와 우리를 변화시키셨다. 새로운 존재의 발목을 잡는 것은 죄이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만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신다. 죄와 결별하고 자유로워진 사람을 거듭났다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는 죄의 사슬을 끊고 구속의 날개를 달아주셨다. 내가 살고 국가공동체가 사는 길은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믿음만으로 가능하다. 예수 말고는 해법이 없다.
이즈음에서 한국교회는 오직 예수 신앙에로 돌아가야 한다. 주님이 계셔야 할 보좌를 차지한 점령군들이 내려앉아야 한다. 빈방이 없다며 아기예수를 눈보라 속으로 내몰고 크리스마스 캐럴을 부르는 그 사람들이 제정신을 되찾아야 한다. 십자가 종탑을 세우고 그 밑에서 편 가르고 작당하고 싸우는 그네들이 물러나야 한다. 심판의 철퇴가 내려치기 전 오직 예수 이름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예수가 길이고 해법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