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성경 66권 가운데 ‘신약의 잠언’이라고도 불릴 정도로 실제적인 교훈을 주는 책이 한 권이 있다. 어디일까? 야고보서이다. 16세기 종교개혁자인 독일의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이 야고보서를 가리켜 ‘정말 지푸라기 같은 서신’(a real strawy epistle)이라고 불렀다.
당시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잘못된 신학 때문에 여러 문제가 생기니까, 루터와 같은 종교 개혁가들이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라고 하는 기치를 높이 세웠다.
로마서를 통해 큰 은혜를 받은 루터는,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써 믿음을 통하여 받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런데 야고보서에서 자꾸 행함을 강조하니까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마르틴 루터가 극단적으로 말했거나 잘못 생각한 것이다.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늦게나마 루터가 자신의 주장이 옳지 않았음을 인정했다는 얘기가 있다. 지금 천국에 있는 루터는 야고보와 손을 잡은 채 자신의 생각이 짧았음을 말하면서 그에게 사과했을 법하지 않은가!
로마서는 원래 믿지 않는 이방인이었던 로마의 크리스천들에게 쓴 것이고, 야고보서는 이미 믿은 유대인 크리스천들에게 쓴 편지이기 때문이기 때문에 서로 모순이 되지 않는다.
한 마디로 말해서, 서로의 초점이 다르다는 얘기다. 로마서의 초점은 ‘예수를 믿으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받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삶은 뒤에서 다룬다.
그런데 야고보서에서는 ‘당신들이 예수를 믿었다고 하면서 어떻게 그렇게 살 수가 있느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사는 것이다.’라고 한다. 신약의 잠언이라는 야고보에서 제일 중요한 내용이 있다.
어디일까? 야고보서의 핵심이요, 야고보서를 푸는 비밀 열쇠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불행히도 오늘날 대부분의 설교자들이 이 본문의 중요성을 간파하지 못한 채 엉터리 내용으로 설교를 하고 있다.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야고보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란 내용을 엄청 많이 강조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행함이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서의 삶을 잘 살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제기 된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여기에 있다. 약 1;23~25이다. 이 구절은 야고보서에서 제일 중요한 본문이다. 우리가 행함이 있는 참 믿음의 사람으로 살 수 있는 해결책(solution)을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해결책 없는 주장은 아무런 쓸 데가 없다. 야고보서가 아무리 행함을 강조하는 책이라 하더라도 행함을 가능케 하는 비결이 무엇인지가 제시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야고보서는 성도들에게 그들의 문제성뿐 아니라 처방전까지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일부 설교자들은 이런 사실을 모른 채 이 본문으로 변죽을 울리는 설교만 하고 있다. 이는 마치 보화를 보고도 캐낼 줄 모르는 바보와 같다.
이제 약 1:23~25을 살펴보자. 내용은 다음과 같다.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여기에 두 종류의 사람이 나온다는 사실을 놓쳐선 안 된다. 한 사람(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은 거울처럼 말씀을 보고(듣고)난 뒤에 잊어버림으로 행함이 없는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을 사람)은 말씀을 들여다보고 잊어버리지 않음으로 실천(행)하는 사람을 말한다.
여기 우리말 번역 성경 25절을 보면 원어에 있는 동사가 하나 빠져 있는데, 원문대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거기에 계속 머물러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전자에는 ‘보고’(κατενόησεν, looks at)라는 동사가 사용되었고, ‘허리를 구부리고 자세히 들여다보고’(παρακύψας, stoop to look or look intently at)란 동사와 ‘거기에 계속 머물러 있는’(παραμείνας, remain or abide by it)이란 두 동사가 활용되었다.
이 자체에서 벌써 우리는 두 사람의 차이를 쉽게 확인해볼 수 있다. 말씀을 보고(듣고) 잊어버림으로 행함이 없는 사람도 슬쩍 본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자세히 보았다. 문제는 보고 나서 잊어버렸다는 데 있다. 분명히 거울로 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갔는데 곧 잊어버린 것이다. 잊어버렸으니 행함(수정)이 불가능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여기서 매우 궁금한 점이 하나있다. 뭘까?
‘κατανοέω’란 동사도 슬쩍 보는 것이 아닌 ‘자세히 보는 행위’를 뜻하는데, 자신의 얼굴을 거울로 자세히 봤을 텐데 어째서 즉시 잊어버린 것인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단서는 두 가지다. 첫째는, 거울을 자세히 보다가 ‘가버렸다’는데 문제가 있다. 여기서 ‘가다’의 헬라어는 ‘ἀπελήλυθεν’인데, 그 뜻은 ‘가버리다’나 ‘떠나버리다’(go away, depart)이다. 이 동사가 암시하는 바는 무엇일까?
거울을 잠시 자세히 쳐다보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계속해서 거기 머물러 있으면서 자신의 모습을 관찰했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다는 의미이다.
둘째 단서는 ‘거울’에 있다. 신약시대에는 광을 낸 구리로 만든 동경(銅鏡)을 거울로 사용하였다. 사람들은 얼굴을 닦고, 수염을 깎으며, 화장을 하고 머리를 빗을 때 거울을 사용했다. 한 마디로 하면, 거울은 자신의 얼굴에 어떤 흠이 있는지를 살피는 수단이었다.
당시 제일 좋은 거울은 고린도에서 나는 청동(bronze)으로 된 거울이었으나, 문제는 그때의 동경이 오늘날의 유리처럼 선명한 영상을 보여 주지 못한다는 점이었다(참고 고전 13:12). 그래도 더 오래 머물면서 자신의 모습을 관찰하면 얼굴에 난 흠을 제대로 발견할 수 있었을 텐데, 이 사람은 그러질 못한 채 떠나버렸다. 그러니 처음엔 주의 깊게 보았다 하더라도 지속적으로 자세히 살피고 관찰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면 행함으로 실천하는 두 번째 사람은 행함이 없는 첫 번째 사람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거울을 예로 들자면, 그는 허리를 구부리고 자세히 거울을 관찰하고,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거기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행함이 가능하고, 그런 자가 복 있는 사람이라고 25절은 말씀하고 있다.
동경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관찰하고 또 관찰해야 행함이 있는 산 신앙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어떤 점에서 볼 때 성경은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 증거들은 다음과 같다. 먼저 시 119:105절을 참조해보자.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또 시 119:11도 찾아보자. “내가 주께 범죄 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임과 동시에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한다. 하지만 ‘성경은 쉽게 자신의 비밀을 열어주지 않는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오늘날의 유리처럼 아주 선명하게는 관찰할 수 없는 동경을 제대로 관찰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쳐다봄을 통해 자신의 허물과 부족함을 잘 관찰하고 기억해야 자신의 문제성을 제대로 고칠 수 있듯이, 참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분의 말씀을 계속 관찰하고 연구하고 마음에 새기고 묵상해야 자신의 삶에 변화의 열매를 맺는 성도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성경을 떠나선 결코 열매 맺을 수 없다. 성경 앞에서의 지속적인 관찰과 연구만이 행함을 가능케 할 수 있다. 그렇다. 성경은 쉽게 자신의 비밀을 열어주지 않는다. 계속해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열린다. 말씀 앞에서 지속적인 관찰과 연구를 통해서만이 행동하는 참 신앙인이 될 수 있음을 꼭 기억하고 살자.
글을 주신 신성욱 교수는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설교학 교수,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에서 공부했음, University of Pretoria에서 공부했음, Calvin Theological Seminary에서 공부했음,총신대 신학대학원에서 언어학 전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