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밤, 데일 카네기(Dale Breckenridge Carnegie)가 파티에 참석하게 되었다. 낯선 사람들과 둘러앉아 식사를 하는 중, 그 옆에 앉아 있던 사람이 “인간이 아무리 일을 하려고 해도 최종적인 결정은 신이 내린다”라고 말하며 성경에 나오는 구절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카네기가 볼 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가 아는 상식으로 그것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나오는 말이었다. 카네기가 즉시로 반론을 제기하자, “뭐라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요! 그 말은 분명 성경에 나오는 말입니다!”
마침 옆에 오랫동안 셰익스피어를 연구해온 프랭크 가몬드(Frank Garmond)에게 물어보았다. 그때 가몬드는 식탁 아래로 카네기를 툭 치면서 말했다. “데일, 자네가 틀렸네. 저 신사분의 말씀이 맞아. 그 말은 성경에 있는 말일세!”
카네기는 견딜 수 없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가몬드에게 물었다. “자네는 그 인용문이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나오는 말이란 것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물론 알지. 햄릿 4막 2장이지, 하지만 데일, 우리는 그 즐거운 모임의 손님이잖아.
왜 그 사람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나? 그렇게 하면 그가 자네를 좋아하게 되나? 그가 자네에게 의견을 물었나? 왜 그 사람과 논쟁하며 좋은 시간을 망치려고 하나?” 이 내용은 「데일 카네기 이야기」 중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나(신성욱 교수) 역시 카네기가 남긴 교훈을 몸소 체험한 사람이다. 변증 쪽에 재능을 타고난 나는 대학교 2학년 때부터 이단을 연구하고, 이단에 빠진 사람이나 이단 교리를 가르치는 선생들과 상대해서 회심시킨 경험이 꽤 있다.
그런 사람들과의 논쟁에서 성경적으로나 교리적으로 져서는 안 된다는 건 기본에 속한 일이다. 하지만 그들과 만나 다투거나 논리적 싸움에서 이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알 필요가 있다. 무슨 싸움에서건 패자는 자존심이 상하기 마련이다. 때문에 승자에게 전적으로 승복하거나 그의 편이 되는 일은 거의 없다.
이단에 속한 사람들을 만날 때는 달리 접근해야 한다. 우선 나 자신을 백 프로 오픈해버려야 한다. 싸우거나 이기러 왔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상대방 교리가 갖고 있는 장점을 언급하면서 나 자신과 한국 기독교의 문제점과 교리적 약점을 먼저 고백함이 중요하다.
이단에 빠진 사람들 대부분이 교회에서 시험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상대방의 마음은 거의 무장해제가 된다. 그럴 때 상대방 교리가 갖고 있는 치명적인 문제와 결함을 조금씩 노출시켜 나가야 한다.
이단과의 논쟁에서 처음부터 이기려 하거나 실제로 이겼다 생각해보라. 사실 싸움에서 비참하게 깨지고 패배한 상대방에게서는 어떤 변화와 회심도 기대하기 어렵다.
논쟁을 벌이는 중에 상대방의 자존심은 상할 대로 상하게 되고, 상처 또한 클 것이기 때문이다. 싸움에선 지지 않고 통쾌하게 이겼는지 모르지만 상대방을 내 편으로 변화시키는 일에는 실패하고 만다.
데일 카네기 친구가 교훈으로 깨우친 한 마디는 대인관계 뿐 아니라, 이단과의 만남에서도 적용되어야 할 중요한 자세이다.
그런데 카네기나 그의 친구가 알고 있던 지식이 옳지 않았다는 사실은 꼭 밝혀두고 싶다. 카네기 옆에 앉은 사람이 해준 문장은 그의 말대로 성경에서 유래됐음이 사실이다. 셰익스피어는 성경에 있는 그 내용을 자기 작품에 차용했을 뿐이다.
내가 찾은 그 성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필자 신성욱 교수는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설교학 교수이다.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에서 공부했음, University of Pretoria에서 공부했음, Calvin Theological Seminary에서 공부했음, 총신대 신학대학원에서 언어학 전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