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문화 유산의 도시, 베이징(北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기내 방송이 목적지에 다다랐음을 알린다. 서울 김포공항에서 단 두 시간이면 중국의 심장부에 닿는다. 베이징은 오랜 역사를 거치며 명멸한 중국 왕조들의 '중심'이었기에, 자금성과 천안문 광장, 만리장성 등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유적지와 관광지들이 즐비한, 그야말로 '세계 문화 유산의 도시'다.
중국은 공산당 정권이 건재하지만, 기독교인들의 숫자도 날이 갈수록 늘고 있다. 성도 수가 1억 명에 달한다는 통계도 있을 정도. 본지는 뉴차이나투어와 함께하는 '베이징 미션 트립'을 위해 지난 4월 20일부터 23일까지 베이징 곳곳을 답사했다.
김수진 박사(한국교회역사연구원 원장)가 저술한 「중국개신교회사(홍성사)」에 따르면, 중국 기독교(개신교) 역사는 1807년 9월 런던선교회 소속 모리슨(Robert Morrison, 馬禮遜, 1782-1834) 선교사가 광저우에 입국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첫 선교사' 모리슨 이야기는 본지의 '광저우 선교 200년' 칼럼을 통해 자세하게 만날 수 있다.
[광저우 선교 200년]
▲중국 최초의 선교사 로버트 모리슨과 중국인 동역자들. ⓒ크리스천투데이 DB
중국 기독교 역사는 크게 네 시기로 나눌 수 있는데, 제1기는 모리슨 선교사의 입국 이후 1860년 청나라가 영국·프랑스·러시아 3개국과 체결한 '베이징조약' 체결까지로, '선교 준비기'라 할 수 있다. 이 1기는 1842년 아편전쟁 종결을 위해 영국과 체결한 '난징(南京)조약'을 기점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뉜다. 전기에는 동남아를 근거지로 삼고 중국 선교를 준비했고, 후기에는 난징조약 이후 개항된 상하이(上海) 등 5개 지역에서 선교를 시작했다.
이 시기는 청나라가 국내외적으로 커다란 변화를 겪으면서 쇠퇴하던 때로, 베이징조약 체결을 통해 '선교의 자유'가 인정됐다. 제1기 끝 무렵은 유럽 지역에서 '선교'가 활발했던 때였던 만큼 중국에 교회를 설치했던 선교회가 22개, 선교사 수도 150여 명에 달했지만, 중국인 교인 수는 350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제2기는 1860년부터 1900년 '의화단운동(義和團運動)'까지를 이르며, '교회 건설의 시기'로 불린다. 구미 열강이 청나라를 점점 압박했던 것과 동시에, 만주족에게 점령당한 한족(漢族)들이 서양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근대화 바람이 불기도 했다. 그러나 천주교회에 대한 반기독교 운동도 거셌는데, 중국인들은 천주교회와 개신교회를 같은 곳으로 봤기에 의화단운동 당시 135명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죽임을 당했다.
이러한 박해와 환란을 통해 기독교는 오히려 성장한다. 제3기는 1900년부터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까지 이르는 '교세 확장의 시기'로, 세례를 받은 신자 수만 1900년 112,808명, 1912년 235,303명, 1920년 366,524명에 달했다. 세례를 받고도 교회에 출석하지 않은 사람이나 세례를 받지 않고 교회에 출석한 사람까지 합하면, 1915년 526,108명, 1920년 806,926명이나 됐다.
이 시기 중국교회에는 선교회 50여 곳이 활동하고 있었기에, 부흥운동과 함께 교파 간 협력·연합운동이 활발했다. 또 이 시기에는 제2기에 많이 세워진 '미션스쿨'의 교육 결과 중국인 지도자들이 급부상했고, 해외 선교회들의 지배와 보호에서 벗어나 자립하고 자주적으로 전도 활동을 시작했다.
특히 1922-1927년에는 '기독교 중국화 운동'이 일어났다. 그 일환으로 1922년 여러 교파들은 연합하여 '중화기독교회(The Church of Christ of China)'를 설립하고, 현 삼자교회(三自)의 모토인 '자치(自治)·자양(自養)·자전(自傳)'을 내세웠다. 이는 중국 사회에서 제국주의·군벌 세력을 타도하고 자주독립 국가를 건설하자는 국민혁명이 주창한 '반기독교 운동' 여파이기도 했다. 이와 함께 '예수 가정(Family of Jesus)'이나 워치만 니(倪柝聲)의 '소그룹(敎會聚會所)' 등 독자 노선도 출범했다.
제4기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부터 현재까지로, 공산주의 국가로서 교회 조직을 만든 시기다. 삼자운동 조직이 교회를 대표하는 조직이 돼 현 '중국기독교 삼자애국운동위원회'로 이어졌고, 이를 거부하는 이들은 '가정교회'로 명맥을 이어 오다 개방화 이후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베이징의 '대형교회', 충원문교회를 가다
베이징 도심에 자리한 충원문(崇文)교회는 지금으로부터 무려 146년 전인 1870년, 미국 남감리교 출신인 애즈베리 선교사를 기념하기 위해 설립됐다. 1900년 반외세를 표방한 의화단운동 때 불에 탔으나 1904년 재건됐고, 현재는 유적으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다. 충원문교회는 '화북 지역'에서 가장 큰 예배당이기도 하다.
충원문교회는 매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성도가 6천여 명에 달해, 하루 세 차례 예배를 드리고 있다. 오후엔 조선족들을 중심으로 '조선어 예배'를 드린다. 베이징 주재 외국 대사와 직원들을 비롯해 외국인들도 많이 참석한다. 빌리 그래함 목사가 설교한 적도 있고, 1998년에는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 부부가 중국 방문 중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지난해 4월 12일에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이영훈 목사가 주일예배에서 설교하기도 했다.
일행은 4월 20일, 베이징 도착 첫날부터 충원문교회를 찾았다. 수요예배가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설렘과 기대감을 안고 교회로 들어서니, 1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자리에 앉아 찬양을 드리고 있었다. 극심한 베이징의 퇴근길 교통 체증을 뚫어낸 사람들이 계속해서 예배당으로 들어왔고, 수요일임에도 250여 명이 함께 예배를 드렸다. 주일예배 때와는 달리, 거의 다 중국인들이었다.
[베이징 미션트립 충원문교회]
'수요 성경공부'에 앞서 40여 분간 찬양이 이어졌다. 찬양곡은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처럼 우리 찬송가에 있는 곡들도 있었지만, 반대로 잘 모르는 곡들도 있었다. 피아노 한 대에 여성 두 명이 마이크를 대고 인도와 노래를 겸한 것이 전부였지만, 사람들은 뜨겁게 함께 불렀다. 마치 1960-70년대 마룻바닥에서 무릎 꿇고 찬양하던, 우리 부흥기의 영성을 그대로 옮겨온 듯했다.
충원문교회 전도사가 맡은 '성경공부'는 시종 진지하고 열띤 가운데 진행됐다. 전도사는 1시간 가까이 '새 생명'이라는 교재를 바탕으로 성경을 가르쳤고, 교인들은 중간중간 손을 들어 질문을 하거나 전도사의 질문에 적극적으로 대답하면서 집중했다. 대부분 자발적으로 나온 이들이어서 졸거나 딴청을 부리는 경우도 없었다.
예배에 함께 참석한 한 한국인 성도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열심으로 예배하는 중국 교인들을 접하면서, 그간 타성에 젖어 나태하게 신앙생활하던 모습들을 많이 회개하게 됐다"며 "중국인들의 '뜨거운 신앙'을 가슴 깊이 새기고, 돌아가서 다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겠다"는 소감을 나눴다.
현지 조선족 유덕 목사에 따르면, 현재 중국인들은 영혼에 '갈급함'이 많은 상태여서 스스로 교회를 찾아와 예배를 드리거나 성경공부에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이날만 처음 교회에 나왔다고 스스로 '밝힌' 이들이 10여 명이었다. 이들은 성경공부 후 따로 모여 현지 교역자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유덕 목사는 "조선족의 경우 몇 년 전만 해도 성도 수가 7-8백 명에 이르렀지만, 한국 등으로 이주하거나 집값 등의 문제로 베이징 근교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아 지금은 150여 명 정도 출석하고 있다"며 "'조선어 예배'를 주일 오후에 드리고, 현재 교역자는 저까지 3명이다. 조선어 예배는 한국 한 장로님 부부의 지원을 통해 처음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소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