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는 사냥을 생계수단으로 하는 직업사냥꾼이 존재했다. 이를 산척(山尺)이라고 하고 그 후예를 산행포수(山行砲手)라고 불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산속에는 산척이라는 자들이 곳곳에서 활을 가지고 사냥으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는 기록이 있다.
산척은 조선전기에 고을마다 여러명이 존재했다. 산척이 되려면 무예실력이 뛰어나야 했다. 조선후기에 들어와서 병적부에 기록된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산행포수만 수 천명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을 물리친 경상도 의병 부대는 산척이 주축이었고, 진주성 전투에서도 산척들은 매복 작전으로 왜군을 패퇴시켰다. 평소 사냥으로 활 쏘는 실력이 정규군보다 뛰어났다. 한반도에서는 오랜 세월 호랑이에 의한 인명 및 가축피해가 극심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에는 호랑이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위해를 가했을까. 중국속담에 까지 조선땅에 서식하는 호랑이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조선사람들은 1년 중 반은 호상 문상을 다니고, 반은 호랑이 사냥을 다닌다". "조선의 1년 중 반은 사람이 호랑이를 사냥하러 다니고, 반은 호랑이가 사람을 사냥하러 다닌다". 이와 같이 중국에 까지 호환에 대한 소문이 나있을 정도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호랑이에게 피해를 입었는가를 알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호랑이’를 검색하면 총 684건의 호랑이 관련 이야기가 나온다. 세조는 여러 차례 직접 호랑이를 포획했다고 해서 ‘큰 호랑이’라는 별명을 가졌다. 영조10년에는 ‘사나운 호랑이가 횡행(橫行)하여 여름부터 가을에 이르기까지 죽은 자의 총계가 140인이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호환(虎患)이 많았다.
조선의 마지막 국왕인 고종때까지 지방거주자는 물론이고 한양 사람들조차 호랑이에게 변을 당할까 두려워 밤에는 이웃집 방문조차 못했다. 조선을 여러 차례 여행했던 비숍은 그의 여행기에서 ”조선에서 여행하는 것은 호랑이와 귀신에 대한 공포 때문에 매우 위험하다. 밤에는 거의 집 밖을 나가지 않는다”고 적고 있다. 조선왕조는 건국초기부터 호환으로 골머리를 앓았다.
조선건국 직후 계속된 호랑이의 출몰과 백성들의 피해가 속출하자 호환(호랑이 공격피해)제거는 조선왕조의 정국 안정을 위해서 시급히 해결해야할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었다. 호랑이가 개경 성안까지 들어오고, 개경 부근의 묘통사에 출몰하는 등 호랑이의 위협은 시간과 공간을 가리지 않았다.
또한 사신이 북경으로 넘어가는 길목인 압록강 서쪽에서는 도적과 호랑이에게 침해를 당할 가능성이 커서 명나라 조정에 호송을 부탁할 정도였다.
태종 2년(1402)에는 경상도에서 호랑이 피해를 입어 사망한 자가 수백 명에 이르렀다. 마음 놓고 길을 다닐 수 없을 뿐 아니라 밭 갈고 김매기가 어려운 정도였다. 호랑이는 강화도 부근 목장에서 마필을 상하게 할 뿐 아니라 밤에 경복궁 근정전 뜰까지 들어왔다고 한다.
이익(1681∼1763)의 『성호사설』에는 이와 관련된 기록이 있다. “지난 해에는 범(호랑이) 몇 만 마리가 잇달아 압록강을 건너와서 조선 천지에 퍼지게 되었다. 사람을 수없이 물어 죽이고 가축을 없애 그 화가 지금까지 그치지 않는다”고 했다.
청나라에서 대규모 호랑이 사냥을 일삼기 때문에 수 만 마리의 호랑이가 조선으로 넘어왔다. 호랑이는 하루 밤에 보통 70∼80㎞씩 이동하지만, 최대 300 ㎞까지 이동 할 수 있다. 제주도를 제외한 온 조선천지는 호랑이의 서식지가 되었다. 한 해 동안 호랑이 수 만 마리가 조선으로 건너 옴으로써 18세기 이후 호환의 문제는 이전보다 훨씬 더 심각해 졌다.
산골마을에는 적어도 아들 셋을 낳아야만 대를 이을 수 있다는 말이 생겨났다. 한명은 호랑이에게 물려가고, 한명은 질병으로 잃고, 하나만 남게 된다는 이야기다. 지방에 비해 치안상태가 양호한 도성안의 주민도 호환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행상을 하는 상인이 봇짐을 지고 길을 재촉하다가 호랑이공격을 받기도 하고, 나물 캐던 아낙네와 고기잡던 낚시꾼, 밭갈고 김매던 농부가 재앙을 당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일상생활을 하는 백성들이 피해를 입게 되자 공공의 적 1호는 호랑이가 되었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경복궁이 1865년 중건될 때까지 300여년 간 폐허로 방치되자 조선의 궁궐터에 임금대신 호랑이가 드나들었다. 그래서 인왕산호랑이란 말이 이때부터 생겨났다. 선조는 “창덕궁 안에서 어미 호랑이가 새끼를 쳤는데 한두 마리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한국 호랑이를 연구한 서울대 이항(수의학) 교수는 “호랑이는 깊은 산골보다 오히려 펑퍼짐한 산과 넓은 들판, 큰 강이 흐르는 지역에 주로 서식했다. 서울은 호랑이가 살기에 좋은 환경이다”라고 말했다.
예종실록에는 “호랑이가 청량동(지금의 청량리)에서 사람을 해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인조반정 때 반정군이 무기를 소지한 채 무리지어 이동하다 관아에 적발되면 호랑이 사냥을 핑계로 무사통과했다고 한다.
1893년 12월 12일 승정원일기에는 경복궁 인근에서 5일에 한 번꼴로 호랑이가 출몰했고, 삼청동과 창덕궁, 창경궁 등 궁궐안에까지 호랑이가 출몰했다는 기록이 있다.
사냥꾼이 호랑이를 잡아오면 일단 관아로 끌려가서 형식적으로 곤장 3대를 맞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호랑이도 엄연히 산군(山君)인데 괘씸하게 왕을 잡았다는 이유 때문이다. 물론 장난식으로 툭 건드리는 정도이다. 그러고 나서 포상금을 받았다.
서울에는 사연 많고 한 많은 고개 네 개가 있다. 미아리 고개, 무악재 고개, 아현동 고개, 망우리 고개가 그것이다.
지금은 도로가 뚫리고 땅속으로 지하철이 다니기 때문에 고개를 고개로 의식하지 못하고 지낸다. 그 중에서 무악재는 호랑이가 항상 출몰하는 무서운 고개였다. 호환으로 인한 피해가 늘어나자 조정에서는 백성을 보호하기 위하여 지금의 독립문 근처에 군사를 주둔시켜 통과인원이 10여명 모일 때까지 가다렸다가 앞뒤로 호위하여 고개를 넘었다. 이리하여 한때는 '모아재'라 불리기도 했다.
한반도에 호랑이가 멸종된 시기는 일제 강점기였다.
조선총독부는 해로운 맹수를 제거하여 제국의 신민을 보호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경찰 등을 대대적으로 동원하여 맹수사냥에 나섰다.
조선인은 총기를 소지할 수 없기 때문에 사냥은 일본인이 담당하고 한국인은 몰이꾼으로 징발되었다. 호랑이, 표범 등을 포획하면서 멧돼지, 노루, 사슴등도 대량으로 살상되었다.
호랑이와 표범의 먹잇감이 크게 줄어들자 이 또한 한반도에서 맹수가 멸종하게 된 간접요인이 되었다. 일제의 맹수제거 작전은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1924년 이후 한반도에서 호랑이에 의한 인명피해는 거의 사라지게 되었고 사실상 호랑이는 한반도에서 멸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