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23일 오후2시 종로 5가 한국기독교연합회관 3층 대강당에서 (사)한카문화교류협회, (사)한국미래포럼, 한울선교회 공동주관으로 포럼이 열렸다.
1부 예배는 한국미래포럼 상임회장 박경진 장로가 인도했다. 대표기도는 (사) 한카문화교류협회 직전회장 최광혁 장로, 성경말씀은 디도서 3장1-2절을 사)한국미래포럼 사무총장 양광옥 장로가 봉독했다.
‘통치자들과 지배자들에게 복종하고 순종하며 언제나 착한 일을 할 수 있는 백성이 되라고 교우들에게 깨우쳐주시오. 그리고 누구를 헐뜯거나 싸움질을 하지 말고 온순한 사람이 되어서 모든 사람을 언제나 온유하게 대하도록 가르치시오’
설교는 무지개언약교회 최효석 목사가 '그리스도인 답게’ 제목으로 메시지를 전했다. 예물봉헌를 위해 한카문화교류협회 회계 김문영 장로가 기도를 했다.
2부 특강은 한카(카나다)문화교류협회 대표회장 권승달 장로 사회로 초청강사 인요한 박사(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소장)가 ‘개화기와 선교사’ 주제로 원고 없이, 조선 말기에 미국선교사들이 이 땅에서 어떤 고초를 겪으면서 어떻게 헌신했는가를 소개했다. 인요한 박사(의사)는 전라(전주-남주)도에 복음의 씨앗을 뿌린 유진벨 선교사의 후손으로 순천 출신이며 한국으로 귀화까지 했다.
그는 전남 구례 지리산 왕시루봉 선교사유적지(12채)를 보전하려고 많은 노력을 하고있다.
인요한의 진외증조부 유진 벨 선교사는 스코틀랜드계 미국인이며,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로 1895년 4월 8일 한국(조선)에 파송되어 전주 광주 목포 지역에서 선교 활동을 하면서 학교와 병원을 설립했다. 그의 딸 샬롯 벨은 인요한의 친할아버지 윌리엄 린튼과 결혼한다.
윌리엄 린튼은 미국 남부 앨라배마주에서 태어났으며, 22세 때 한국(조선)에 와서 48년간 전주와 군산 목포 일대에서 선교와 교육, 의료봉사를 해왔다. 백범 김구 선생의 주치의 역할을 하였다.
3.1 독립운동 당시에는 기미독립선언서 작성 참여와 운동의 지원, 해외에 홍보를 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후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고초를 겪은 적이 있는데, 그 공로가 인정되어 2010년에 3.1 운동 91주년 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국가보훈처 건국훈장 애족장 28명 중 '윌리엄 린튼 W.A.Linton (3.1운동)' 확인 가능.
인요한 박사 아버지 휴 린튼은 윌리엄 린튼의 3남이다. 할아버지의 선교활동 영향으로 전라북도 군산에서 출생하였으며, 미국으로 건너가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신학대학을 다니던 중 1950년 한국전쟁 소식을 듣고 미국 해군장교로 복귀해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하였다.
이후 자신의 아버지인 윌리엄 린튼의 한국 선교활동을 이어받았다. 어머니 로이스 린튼은 미국 플로리다에서 태어나 신학대를 졸업하고 결혼한 남편을 따라 한국(조선)으로 이주했다.
형 스티브 린튼은 북한 어린이에게 결핵 의약품을 보내는 유진 벨 재단을 운영하고 있다. 북한에는 80번 이상 방문했으며 김일성과도 두 차례 만났다.(북한에서도 독립운동을 도운 공을 인정했다)
4대째인 인요한 자신은 2012년에 한국사회에 끼친 공로를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특별귀화를 허락받아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였다.
인요한의 형 스티브 린튼(인세반), 조카 데이비드 조나단 린튼(인대위), 조카 레이첼 조이 린튼도 독립유공자의 자손에게 부여하는 대한민국 국적을 수여받고 이중국적을 허용 받았다.
인요한은 연세대 의과대학 동창 인연으로 만난 치과의사 출신의 한국인 여성과 결혼하였다. 자녀로는 1남 2녀를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