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염된 지구 위에 건강한 교회가 가능할까?” 답은 “아니오”다. 세상이 병들면 교회도 감염된다. 그리스도의 몸은 면역 없고, 무균 풍선 속에 있지 않다. 우리는 지금 선교적 교회론자인 하워드 슈나이더의 이 통찰을 뼈저리게 경험하고 있다. 교회가 생태 위기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이유는 여기에 있다.
현 지구의 위기는 인재(人災)다. 홍수나 가뭄 같은 천재지변조차도 인류가 살아가는 방식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탄소의 과다 배출로 인한 기후위기는 제조업뿐 아니라 농축산업과 교통수단과 가정생활이 모두 복합적으로 연루되어 있다.
오늘의 지구위기는 일부 지역이나 소위 “멸종 위기종”에 국한되지 않는 총체적 양상을 보이고 있다. 또 생물학적 위기만이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 등 삶의 모든 국면이 연관된 위기이다. 이 위기의 핵심에 인간이 있다. 현대인의 세계관과 삶의 방식이 모든 생명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음이 확인되고 있다. 생태와 환경에 관한 근본적인 신학적 반성이 요구되는 이유다.
생명은 창조의 극치다. 그것의 번영이 창조의 궁극적 목적이다. 자연의 모든 것은 창조의 결정체인 생명을 유지하고 번성하여 충만하도록 하기 위해 존재한다(창 1:28, 참고 시 104).
문화도 같은 목적을 가진다. 만물에 생명을 주신 하나님(딤전 6:13)께서 인간에게 모든 생명을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맡아 돌보게 하셨기 때문이다(창 1:28, 2:15).
“문화명령”은 생명 번영의 책임을 포함한다. 창조의 목적이 생명을 풍성케 함이라는 증거는 무엇보다 요한계시록이 보여준다.
마지막 날 완성된 문화는 생명이 넘치는 치유된 창조라는 것을 분명히 해주기 때문이다(계21:1-4, 22:1-2). 하나님께서는 창조와 완성된 문화를 통해서 그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이처럼 창조와 종말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환경에 대한 책임이 있음을 분명히 해준다. 세상은 지극히 아름다운 곳이었다. 하지만 그 완벽하고 선하던 창조 세계가 생명을 돌봐야 할 책임을 다하지 못함으로 지금 매우 심각한 위기에 봉착해 있다.
그 위기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오만한 자율적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탐욕과 무절제한 생활 방식과 이를 부추기는 소비 자본주의 물신 숭배적 문화엔 생명을 파괴하는 제도와 장치가 가득하다.
성경적 문화는 생명의 번영에 그 궁극적 목적이 있다. 현대 문명에서 자연을 정복과 착취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은 성경적 세계관에 배치된다.
창세기의 “문화명령”(1:26-28)은 결코 자율적인 인본주의적 세계 지배를 정당화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돌볼 책임의 소명을 강조한다. 성경은 희랍철학이나 불교처럼 물질세계를 부정하거나 비하하지 않는다.
우리는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으며, 세상도 온전히 회복될 것을 믿는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이 제1의 환경이라면, 인간이 만드는 문화는 제2의 환경이다. 자연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문화는 인간의 소명이다. 하지만 자연과 문화는 한가지 근본적 목적에 있어 일치한다.
자연과 문화 모두 생명을 위해 존재한다. 생명의 번영과 이를 통한 하나님 영광의 현현이 창조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살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므로 죽음을 가져오는 것은 바른 문화가 아니다. 오늘의 위기는 세계를 돌봄이 없는 지배란 파멸적인 우매일 뿐이라는 점을 알게 한다.
교회는 세상 속에 있다.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 회복하게 하셨고 온전케 하신다는 소망이다. 따라서 교회는 세상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 존재한다.
슈나이더의 말에 다시 귀 기울여 보자. “세상이 병들고 오염되면 교회도 고통을 당한다. 그러나 비록 감염되긴 해도 하나님의 치유하는 은총이 교회를 통해 흘러나온다면, 교회는 여전히 치유의 징표와 증인이 될 수 있다.” 교회가 지금 힘써야 할 일이 그것이다.
우리는 성경적 삶을 회복하는 일에 앞장서 창조와 복음의 증인과 일꾼이 되어야 한다.
한교총 탄소중립 창조회복교회 만들기 공동 캠페인 칼럼
필자 : 신국원 총신대학교 명예교수, 『기독교인의 생활 윤리』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