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블럼-꿈을 새겨 넣다
자동차의 엠블럼은 차에 있어서 신분증이나 다름없습니다. 엠블럼은 자동차의 품격과 전통을 상징하기도 하며, 회사가 꿈꾸는 가치를 드러내는 중요한 요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자동차의 엠블럼 중에서 여러분은 어떤 자동차의 엠블럼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한 청년은 BMW의 엠블럼이 가장 좋은 데 그 이유는 B:Bus·Bicycle, M:Metros, W:Walking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 합니다.
사실 BMW는 Bayerische Motoren Werke 즉 ‘바이에른 모터 공작소’란 뜻으로서 회사 설립 당시 비행기의 프로펠러를 형상화 한 것입니다. 1916년 뮌헨에서 항공기 엔진회사로 설립된 BMW는 1917년 현재의 이름이 되었고, 1927년 그 해에 총 87개의 세계 항공 기록이 수립되었는데, 그 중에서 29개의 기록이 BMW엔진을 장착한 비행기에 의해 세워질 정도로 뛰어난 항공엔진제조 회사였습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패전으로 끝나자 BMW는 항공기 엔진과 로켓을 생산했다는 이유로 연합국에 의해 3년 동안 생산 금지 명령을 받은 이후 더 이상 항공기 엔진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 후 BMW는 자신들의 엠블럼에 하늘을 날던 그들의 꿈을 깊이 새겨 넣고 오늘도 땅 위에서 그 꿈을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2023년 대망의 해를 맞이하여 우리도 큰 비전을 품고 한해를 시작하려 합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여러분의 엠블럼을 새기고 끔을 꾸고 있습니까?
여기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옵니다. 지금부터 약 2700년 전입니다. 이들은 물과 양식을 가장 중요한 인생의 가치로 생각했습니다. 농사를 잘 짓기 위하여 비가 필요하고 해가 필요했기 때문에 풍요의 신 바알을 선택합니다. 자신들의 생애를 걸고 가치를 걸만한 존재로 바알을 택하였고 바알을 자신들의 엠블럼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이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유다 왕 웃시야 시대와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2세 시대 때 아모스를 선지자로 부르셨습니다. 주전 760년 경 남유다 드고아 출신의 목자였던 아모스를 북이스라엘로 보내셔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시고, 이를 통해 북이스라엘의 죄악의 정도가 매우 심각하였음을 알려 주셨습니다. 선지자로 부름 받은 아모스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의 진노로 임박한 심판을 외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메시지
아모스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외칩니다. 신앙으로부터 벗어나 우상을 섬기며, 가난한 사람을 억누르고 자신들을 위한 이기적인 삶을 살고 이들을 가리켜 아모스는 무엇이라 합니까?
1절에는 그들을 ‘바산의 암소들’이라고 합니다. 바산은 요단강 동편 최북단에 위치한 지역입니다. 해발 500-700m에 이르는 고원지대인데 갈릴리 호수와 요단강, 야르묵강을 끼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 토지가 비옥하고, 목초도 많은 곳이었습니다. 바산의 암소는 북왕국의 번성과 풍요에 기반을 둔 상류층 여성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힘없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가난한 자들을 압제했습니다. 여기에 쓰인 ‘힘없는 자’,‘가난한 자’는 아모스 2:6-7에 쓰인 단어들이기도 합니다. 2장에는 가난한 자를 몇 푼 안되는 돈에 넘기고 그 머리를 땅바닥에 짓밟았다는 진술이 있고, 5장에는 힘없는 자를 밟아 버리고 부당하게 세금을 거두어 들였다는 고발이 있으며, 8장에는 돈 대문에 힘없고 가난한 이들을 매매했다는 고발이 있습니다.
바산의 암소들이 자기 가장(남편)에게 술을 달라고 졸랐습니다. ‘암소와 가장(남편)’은 ‘아내와 남편’으로 보아 부부가 각종 연회(파티)를 즐기며, 술이 주는 쾌락에 빠져 세월을 낭비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암소와 가장’을 ‘신하와 임금’으로 보아 타락한 특권층이 임금과 결탁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고 과도하게 긁어모은 재물로 방탕한 삶을 사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2-3절에서 하나님은 이러한 현실을 향해 단호하게 심판을 선포하십니다. “하나님이 그의 거룩함을 두고 맹세한다”는 표현은 ‘하나님이 그의 이름(렘 44:26, 51:14)을 두고 맹세하다’, ‘하나님이 자기를 두고 맹세하다’같은 표현처럼, 하나님이 반드시 행하실 것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마침내 그들을 심판할 날이 임할 것이니, 그날에 그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갈고리(meat hook)에 걸린 고기와 낚시(fish hook)에 걸린 물고기처럼 끌려갈 것을 예언합니다. 처참할 정도로 무너져 폐허가 된 사마리아성을 밟고 나가며, 어디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형벌의 장소인 ‘하르몬’까지 끌려가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4-5절을 통해서는 북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고발합니다. 벧엘은 갈대아 우르에서 온 아브라함이 가나안에서 처음 단을 쌓은 곳이자, 야곱이 돌베개로 단을 쌓고 예배를 드렸던 곳입니다. 또 길갈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출애굽 후, 요단강을 건너서 처음 진을 쳤고, 첫 예배를 드렸던 영적으로 의미가 있는 장소입니다.
이 두 곳을 언급하는 이유는 성전이 있었던 장소였고, 또 그곳이 의미 있는 거룩한 곳이라 할지라도 그곳에서 범죄를 일삼는다면, 그들이 아침마다 번제를 드리고 삼일마다 십일조를 드리며 온갖 제사를 드린다고 할지라도 아무 소용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벧엘과 길갈에서 이루어지는 일은 희생제사와 십일조, 수은제와 낙헌제입니다. 수은제는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드리는 감사의 제사이며((레 22:29), 낙헌제는 기쁜 마음에서 자발적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 제사들은 기도 응답이나 복 주심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런 제사들을 ‘아침마다’ 드리며 ‘삼일마다’ 십일조를 드린다는 것, 그리고 4-5절에 언급된 여러 제사의 종류 등은 이들이 참으로 정성스럽게 제사했음을 보여줍니다. 여기에 언급된 제사가 자신의 삶에서 경험한 것으로 드리는 감사제와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낙헌제라는 점에서, 4-5절은 당시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번영과 출처를 하나님이라 여기면서 제사 드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절들에서 어떤 불법적이거나 규례를 어긴 제사에 대한 책망을 발견하기는 어렵습니다. 아마도 여기에 예배를 명령하는 명령형이 일곱 번 쓰였다는 점도 이와 연관된 것입니다. 일곱 번의 예배 명령 다음에 “이것이 너희가 기뻐하는 바니라”라는 하나님의 선언이 절정에 이릅니다.
여기서 ‘기뻐하다’로 옮겨진 단어는 ‘사랑하다’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아모스를 통해 하나님은 이렇게 드려지는 여러 제사와 십일조가 자신들만의 사랑의 방법이며 만족일 뿐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4-5절은 이스라엘이 그토록 정성껏 드렸던 제사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과는 전혀 무관한 행동이며, 그들의 제사는 하나님의 명령과도 무관한 종교 행위였음을 보여줍니다. 흔히 마음이 없이 드린 제사가 문제라는 식으로 말하지만, 아모스서는 마음을 담아 정성껏 드린 제사임에도 문제가 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위선적인 종교행위와 자기만족
신명기 12장과 26장에서도 제사, 십일조, 수은제와 낙헌제에 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드린 제사가 함께 살아가는 노비와 분깃 없는 가난한 레위인과 함께 나누어야 할 기쁨의 현장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토지소산의 맏물과 십일조가 필요한 대상 역시 제사장과 레위인을 비롯해 함께 살아가는 가난한 이웃입니다.
그런데 희생 제사와 십일조, 수은제, 낙헌제가 풍성하게 드려지며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감사하지만 이러한 제사가 가난한 자와 힘없는 자에 대한 억압과 압제와 공존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사랑하는 종교 행위에 그치게 될 뿐입니다. 결국 ‘벧엘과 길갈은’ 이웃과의 나눔이 없는 제사, 가난하고 힘없는 자에 대한 억압과 압제가 공존하는 제사를 상징하며, 이러한 제사는 여호와 하나님과 무관한 제사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모스를 통해 그들의 위선적인 종교행위와 자기만족을 엄중하게 경고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끊임없는 선지자의 지적과 경고에도 불구하고 돌이킴이 없는 그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다섯 가지 재앙으로 연이어서 심판하십니다. 흉년의 재앙(6절), 기근의 재앙(7절), 병충해 재앙(9절), 전염병 재앙(10절), 지진 재앙(11절). 이러한 재앙을 말씀하실 때, 후렴구처럼 공통적으로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내게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입니다. 하나님은 돌아오기를 그토록 간곡히 원하시는데, 그들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들이 교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으로, 누리고 있는 것으로 자신들의 인생을 충분히 책임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들을 짓밟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이사야 1장에서도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도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2-6절)라며 탄식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사야서에서 탄식하신 것이나 아모스에서 탄식 하시는 내용은 다 같습니다. 영적으로 잠자는 이스라엘을 깨워 돌아오게 하시려고 고난을 주시지만 이 백성들은 절대로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습니다. 양식을 떨어지게도 하시고, 비를 멈추기도 하시고, 메뚜기를 동원하여 곡식을 다 먹어치우게도 하시고, 전염병으로 치시고, 이방의 군대로 침략을 하여 청년들을 죽게 하시기도 하였으나 목이 곧은 이스라엘은 전혀 돌아설 생각이 없습니다.
다시 온전한 예배자로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이와 같이 네게 행하리라 내가 이것을 네게 행하리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아모스 4:12)
하나님이 이제까지 내리신 다섯 재앙에도 불구하고 돌이키지 않는 이스라엘에게 내릴 판결을 제시합니다. 흔히 일상에서 뭔가 크고 무서운 일을 만날 때, ‘단단히 각오해라’라든지 ‘단단히 준비해라’라는 식으로 표현하는데, 12절 역시 그와 비슷합니다. 하나님이 이제껏 여러 재앙으로 충분히 경고하셨음에도 이스라엘은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은 친히 이스라엘을 만나러 나서십니다. 둘러서 고치려 하였으나, 이제 직접 심판의 매를 드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친히 하나님을 뵈어야 합니다. 결산하고 청산하기 위해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고 명령을 받습니다. 이 만남은 두려운 만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께서 작정하신 심판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 부르심을 깊이 새겨 회개하여 주께 돌아오는 이들은 용서를 받고 심판의 날에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떠나 사는 이들은 그에 합당한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당시 아모스가 활동하던 시대의 경고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어느 순간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예배가 되었고, 정성스럽게 준비한 헌금과 열정적인 헌신도 하나님이 아닌 나의 만족과 기쁨을 위한 것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깨닫지 못하고 돌이키지 않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찾으시는 온전한 예배자로 서야 할 것입니다. 끊임없는 재앙과 경고도 결국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습니다. 내 자신의 번영과 안녕, 복을 누리기 위한 예배가 아닌 내 이웃에 대한 나눔과 베풂이 넘치는 선한 삶이 동반된 예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올해 총회주제는 ‘복음의 사람 예배자로 살게 하소서’(시50:5, 롬12:1)입니다. 복음의 사람이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증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증인입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 모든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요 3:16), 세상을 섬기기 위해(막 10:45) 오셨음을 세상에 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이 세상의 소외된 이웃과 약자들의 친구가 되어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 하나님을 예배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코로나19 시대를 살아가면서 어느 순간 예배하지 못하고 영상예배로 대체하는 전자기기에 갇혀 버렸습니다. 이제 우리는 회복과 함께 예배의 회복이 있어야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함께 모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자연스러운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와 같이 예배가 회복되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길 소망합니다.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는 주제의 말씀이 제82회기 남선교회전국연합회 회원들의 마음에 두려움과 떨림으로 깊은 울림이 있기를 바랍니다. 과거의 연약하고 부끄러운 모습들을 주님 앞에 진심으로 고백하고 하나님 앞에 새롭고 거룩한 마음으로 참된 예배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신앙과 삶에 진심이 담겨지고 이웃과 지역사회를 섬기는 일에 앞장서서 세상을 향해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남선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글 : 김한호 목사(춘천동부교회) 예장통합 남선교회전국연합 기관지 평신도신문 기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