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위한 요한계시록 (1) 장신대 김태섭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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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요한계시록 (1) 장신대 김태섭 교수
  • 박동현 기자
  • 승인 2024.08.16 18: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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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ook of Revelation
신약의 서신들을 해석할 때, 상식적으로 우리는 오늘날 우리의 관점이 아니라, 그 편지가 기록된 2천 년 전(前) 수신자들의 상황과 문화를 기준으로 해석한다. 예를 들어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벧전5:14)는 말씀을 21세기 한국에 사는 우리들의 기준으로 해석하는 사람은 없다.
계시록 

요한계시록은 한국 교회사를 통틀어 가장 많은 논란과 오해의 소지를 남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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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히 몇몇 종교 지도자나 이단들이 계시록을 오독(誤讀)하여 교회와 성도들에게 적잖은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따라서 계시록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가르치는 것은 한국교회의 매우 중요한 사명이라 할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장르(genre)는 박해받는 성도들을 위한 소망의 서신글을 읽는 독자(讀者)가 그 내용을 이해할 때, 그 글의 ‘장르’(genre)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어, 심훈의 ‘그날이 오면’이란 시(詩)의 한 부분을 보자.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중략)…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중략)…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계시록 이미지

주지하다시피 이 시(詩)에서 말하는 ‘그날’은 조국 독립의 날이다. 그날을 학수고대하는 독자들에게 이 시는 울림 있는 깊은 감동을 선사한다. 그런데 만약 이 글의 장르가 시(詩)가 아니라 ‘계약서’(契約書)라고 전제해보자.

그렇다면 이 글은 ‘그날’(계약을 이행하지 못하는 날)이 오면 머리로 종을 들이받거나 몸의 가죽을 벗겨내겠다는 끔찍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결국, 장르를 어떻게 전제하느냐에 따라서 그 글의 해석이 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계시록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계시록이 어떤 장르인지를 아는 것이 필수적이다. 개역개정 계시록은 자신의 장르를 ‘편지’(서신)로 밝히고 있다: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계1:4上). 물론 원어(原語) 성경에는 ‘편지한다’는 표현은 없고,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게”(Ἰωάννης ταῖς ἑπτὰ ἐκκλησίαις ταῖς ἐν τῇ Ἀσίᾳ)라고만 되어 있다.

이는 신약의 다른 서신들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개역개정 에베소서 1:1下도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원어에는 ‘편지한다’는 표현이 없다.

계시록 저자 사도요한 이미지

그저 계시록의 경우처럼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자들에게”(τοῖς ἁγίοις τοῖς οὖσιν ἐν Ἐφέσῳ καὶ πιστοῖς ἐν Χριστῷ Ἰησοῦ)라고 ‘수신자’(受信者)만 밝히고 있다.

이처럼 본문의 서두에 ‘편지한다’는 표현 없이 수신자(受信者)를 언급하는 것만으로 그 글이 ‘서신’임을 밝혀주는 것은 당시 서신들의 일반적이 관행이었다(빌1:1; 골1:2; 살전1:1 등).

이는 오늘날에도 우리가 편지를 쓸 때, “편지한다”는 직접적인 표현 없이, “~에게”라고 시작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렇다면 계시록이 약 2천 년 전 (소)아시아 일곱 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서신)라는 사실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계시록을 독자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그 해석의 기준점을 알려준다.

신약의 서신들을 해석할 때, 상식적으로 우리는 오늘날 우리의 관점이 아니라, 그 편지가 기록된 2천 년 전(前) 수신자들의 상황과 문화를 기준으로 해석한다. 예를 들어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벧전5:14)는 말씀을 21세기 한국에 사는 우리들의 기준으로 해석하는 사람은 없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오늘날의 성도들은 서로 인사할 때 입을 맞춰야 하는 불편한 상황에 직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베드로 사도가 우리에게 직통으로 계시한 것이 아니라, 2천 년 전 (소)아시아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cf. 벧전 1:1-2)

따라서 이 말씀은 당시의 수신자인 (소)아시아 성도들의 문화 속에서 ‘일차적으로 해석’(解釋)돼야 한다(당시의 성도들에게 입맞춤은 자연스러운 인사의 방식이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는 그 교훈은 서로 사랑으로 문안·교제하라- 2 -을 ‘이차적으로 적용’(適用)해야 한다(사랑이란 교훈을 표현하는 방식은 오늘날 우리의 상황에 맞게 ‘악수’라든지 ‘가벼운 눈인사’ 등으로 대체할 수 있다).

이렇게 ‘일차적인 해석’은 당시의 수신자들을 기준을 하고, 그 교훈은 오늘날 우리에게 맞게 ‘이차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신약의 서신을 해석하는 일반적인 순서이자 원리이다. 마찬가지로 계시록을 ‘편지’(서신)로 이해해야 한다면, 그 해석의 기준은 오늘날의 우리가 아니라 ‘2천 년 전 (소)아시아 일곱 교회의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도 계시록을 오늘날 우리들의 관점에서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특히 한국 교회에서 이단으로 간주하는 신천지는 계시록이 편지(서신)라는 사실을 극구 부인한다.

신천지가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계시록이 서신이라는 점을 부정해야 자신들의 입맛대로 그 내용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신천지가 제작한 교리비교 영상을 보면 2천 년 전 [소]아시아의 문화·역사적 배경 속에서 계시록을 해석하는 경우는 전혀 없다).

교회사를 통해 알려진 바와 같이, 이러한 자의적 해석은 결국 많은 혼란과 피해를 기성 교회에 가져왔다. 따라서 계시록의 독자는 계시록이 ‘서신’이라는 점과 그 해석의 기준점이 오늘날이 아닌 ‘2천 년 전 (소)아시아 일곱 교회’ 란 점을 분명히 숙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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