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거부하는 얼굴들, 하나님 말씀으로 꿰뚫고 가야”
박영선·정용섭 목사, ‘설교’ 주제로 장신대서 두 번째 대담
▲장신대에서 대담이 진행되고 있다. ⓒ이대웅 기자
‘최고의 강해설교자’ 박영선 목사(남포교회)와 ‘설교 비평가’로 알려진 정용섭 목사(대구샘터교회) ‘한국교회 설교, 무엇이 문제인가?’를 주제로 4일 오후 서울 광장동 장로회신학대학교(총장 김명용 박사) 세계교회협력센터에서 대담했다. 이날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윤철호 교수(장신대)가 사회를 맡아 진행했다. 이들은 지난달 11일 1차 대담에서와 마찬가지로 ‘설교란 무엇인가’를 비롯해 한국교회 설교와 서로의 장·단점 등에 대해 쉽지만 명쾌한 언어로 묻고 답했다. 다음은 대담 주요 내용.
맷집과 충성과 인내와 용기와 목숨을 걸고 부딪치는 것
-설교란 무엇인가.
박영선 목사(이하 박): 제 설교는 독특한 방법론을 갖고 있다. 강해설교를 하는데, 그 이유는 성경이 말하는 순서대로 연구하듯 따라 들어가 모르는 본문도 택해서 성경이 이야기하는 대로 공감하고 전달하기 위해서이다.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본문에서 택했더니, 어느 본문을 택해도 같은 내용만 설교하게 되더라.
매번 본문을 충분히 드러낸 것 같진 않지만, 씨름을 한다. 그리고 본문을 대할 때마다 그 본문이 갖는 역사성과 현재성 사이의 갈등, 과거의 그것이 무엇을 의미했고 지금 그것이 왜 필요한가를 생각한다. 그 본문이 당시 사회에 대한 가장 분명한 하나님의 어떤 지적이나 이해나 평가나 심판이었고 꾸중이었고 권면이었고 약속이었는데, 오늘 우리 세계의 문제가 꾸중이나 권면이나 약속이나 소망이 될 수 있느냐 하는 것들이 설교 때마다 반복되는 질문이다.
저는 보수주의자이고, 비교적 간단한 결론을 갖고 있다. ‘하나님이 다 하시니, 걱정 말라’는 것이다. 행복한 진영에 속해 있다. 우리는 전문성이 있거나 설명을 잘하는 게 아니라, 합리성이 모자라면 기운으로 극복하고 씩씩하고 진지하게 넘어간다. 그걸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이해와 설득의 요소를 가지는 설교가 또한 전하는 자의 ‘뚝심’에 달려 있다고 믿는 것이다.
마치 권투 시합과 같다. 상대에 따라 늘 전략이나 각오나 전술이 바뀔 수 있지만, 선수가 할 수 있는 것은 잽을 넣다 기회가 오면 펀치를 터뜨리는 것이다. 밤낮 하는 것을 가지고 경쟁한다. 더 때리고 덜 맞으면 이긴다. 맷집으로 버텨야 한다. 똑같은 짓을 계속 하지만, 맷집으로 이기고 포기하지 않아서 이기는 것이다.
우리가 설교를 하면 매번 어떤 관중 앞에 서는가. 그 시대를 사는 내 동족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의 얼굴에 어떤 도전이 묻어 들어오나. ‘빨리 해결해 주세요. 날 편안하게 해 주세요. 쉬게 해 주세요. 자존심을 살려주세요. 목사님이 훌륭한 걸 보여주세요….’ 그런 도전과 시험을 얼굴에 달고 들어온다. 설교는 성경 본문을 전하는 게 전부가 아니라, 이 본문을 거부하는 그 얼굴들을 어떻게 이기느냐 하는 것이다.
성질 부리지 말고, 말씀으로 이겨야 한다. 내 인생에서도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 하나님 말씀이기 때문에 저 상판대기를 꿰뚫고 간다. ‘누가 이기나 보자’ 이것이 설교의 위대함 중 하나이다. 설명하고 해석해낼 수 있는 것은 위대하고 명예롭다. 그러나 기본은 이 싸움이다. 맷집과 충성과 인내와 용기와 목숨을 걸고 부딪치는 것이다.
미국장로교회서 ‘말 통하는 설교’ 하는 사람이 30% 미만
-설교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결국 글쓰기가 잘 돼야 하는 것 아닌가.
정용섭 목사(이하 정): 미국 고든콘웰신학대 데이비드 고든 교수님이 쓴 <우리 목사님은 왜 설교를 못할까(홍성사)?>라는 소책자가 있다. 미국장로교회 설교자들 중에서 최소한 ‘말이 통하는 설교’를 하는 사람이 30% 미만이라고 한다. 설교가 얼마나 뛰어난지는 둘째이고, 대다수가 말이 안 되는 설교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분 진단은 책 읽기와 글쓰기 기초가 안 돼 있다는 것이다. 성경이 글이고 문자 아닌가. 그걸 이해하고 글로 풀어낼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글쓰기는 재주가 아니라 논리적 사유이다. 논리적 사유가 먼저 있어야 따라갈 수 있다. 글을 못 쓴다는 것은 사유가 없다는 말이다. 논리적 사유로 이 세계를 보는 눈이 열려야 텍스트가 읽힌다. 설교도 기본적으로 성서 텍스트를 놓고 얼마나 잘 이해하고 해석해서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느냐 하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신학교에서 이 글쓰기와 논리적 사유에 대한 훈련을 충분히 했으면 좋겠다.
박: 지성은 인간에게 주신 고유한 특권이지만, 그 지성이 얼마만큼 필요한지는 각자 다르다. 지성이 없어도, 지성인이 이 길로 가라고 하면 가면서 도움을 받고 몸으로 때우면서 살면 된다. 목회 길에서 설교를 해 보면 모르는 설교를 해야 할 때가 많고, 현실과 다른 증언을 해야 할 때가 있다. 자신은 괴로운데 행복하라고 설교해야 할 때, 지성으로는 맞지 않다. 그렇다고 정직하게 양심선언을 해선 안 된다. 아픈 건 아픈 거고, 시합은 시합 아닌가. 지더라도 끝까지 붙들고 늘어지면서 여러분의 책임을 지고 견딘다면, 언젠가 기적이 나타난다고 성경은 말한다.
정: 성경을 중심으로 글쓰기를 할 때 첫걸음은 성서 텍스트를 낯설게 보는 것이다. 우리는 선입견이 많아서, 쉽지 않다. 그러나 낯설어야만 알고 싶어진다. 목회자로 10년 살면 솔직히 설교 준비를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설교할 수 있다. 그러나 굳어진다. ‘연어’를 쓴 안도현 시인은 ‘가슴으로 쓰고 손끝으로 쓰라’고 했다. 편한 것들과 결별해야 한다.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본문을 읽은 다음, 본문과 관계 없이 자유롭게 설교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본문 주제와 관계없는 설교들이 너무 많은데. 성경은 역사서이지 교훈서 아냐… 거꾸로 들어가 봐야
박: 주해는 한국교회가 개선해야 할 시급한 문제이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성경을 읽을 줄 모르지 않나 생각한다. 성경은 기본적으로 역사서이지, 교훈서가 아니다. 이스라엘 역사서를 배경으로 신약이 주어진 것이다. 마치 구약은 화면 같고, 신약은 자막과 같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만 해도, ‘그것이 약속되었다’는 것이 굉장히 화면 상에서 중요하다. 그 화면에서 아이가 태어나고, 자막이 나오게 되는데 그 둘을 묶는 일이 만만치 않다.
왜냐하면 소위 역사비평적으로 성경에 기록된 말들을 다 이으면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처녀가 아이를 낳는 것, 천지를 창조하신 것, 말이 안 된다. 오히려 기록을 사실이라고 보고, 앞뒤 모순과 불연속성을 어떻게 꿰매고 있는지를 거꾸로 들어가 보아야 한다.
인간 세상에는 ‘구라’라는 문학 장르가 신화와 동화, 무협지 이렇게 세 가지 있다. 각 나라는 현재를 설명하기 위한 신화가 있다. 어디선가는 시작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말이 안 되는 현실에 분명한 인과율을 주고, 시간상 전후를 어쨌든 메꿔야 한다. 성경도 앞뒤가 맞지 않는 것들이 대단히 많다. 사실대로 이야기하면 ‘구라’가 되니, 뭔가를 제거해야 한다는 게 역사비평이다.
성경이 말하는 중요한 단어들이 있다. 은혜, 믿음, 용서, 구원, 회복…. 우리가 비난하는 많은 설교자들이 그 본문을 읽고 왜 그 설교를 했는가. 사실은 제껴놓은 채 어느 곳에나 있는 은혜, 구원, 축복, 승리, 기적을 외치는 것이다. 본문 해석은 틀렸더라도, 그들은 역사적으로 일하신 하나님의 은혜만은 알고 있는 것이다. 컨텍스트를 놓고 텍스트만 외치면 알 수 없다. 컨텍스트가 없으면 담아지지 않는다. 밤낮 그 설교만 하고 답답하다.
영성과 지성으로 텍스트 소화해서 해명하는 작업이 설교
정: 청중들은 텍스트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다른 이야기를 할수록 좋아한다. 그것이 설교자의 고뇌이다. 대부분 그러한 포퓰리즘으로 빠진다. 텍스트를 일관되게 붙들고 가는 설교자는 박영선 목사님 외에 찾아보기 힘들다.
저는 주해의 실질적인 문제, 텍스트를 바르게 이해하는 3단계를 이야기하고 싶다. 첫째로 일단 본문을 정확하게 읽어야 한다. 말도 안 되지만, 정말 중요한 이야기이다. 성경은 번역본이기 때문에 원래 하나님 말씀을 읽는다고 할 수 없고, 특히 개역개정판에는 오역도 적지 않다.
두 번째로 주석인데, 본문이 있는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 한다. 성서 텍스트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 안에서 나왔다. 그래서 배경을 모르면 잘못 이해할 수 있다. 텍스트의 삶의 자리를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해석이다. 텍스트의 사실성 앞에 솔직해져야 한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조직신학이다. 부분적인 성서 텍스트들이 전체적으로 볼 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조직신학적으로 필터링하지 않으면, 설교가 ‘삼천포’로 빠질 수 있다.
설교자의 영성과 지성으로 텍스트를 충분히 소화해서 해명하는 작업이 바로 설교이다. 고단하지만 이런 작업을 통해 창조적인 설교가 가능하다. 한국교회에서 이것이 잘 안 되는 이유는 성서를 도구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텍트스의 존재론적 깊이를 만나는 경험 없이 신앙적인 도구로 사용하려는 태도 때문에, 이러한 주석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지 못할 뿐더러 그 필요성도 느끼지 않는다.
박 목사님께 꼭 질문하고 싶은 게 있다. ‘하나님의 열심’에 대해 처음부터 쭉 해 오고 계신데, 하나님께 정말 가까이 가고 계시는지, 그게 느껴지시는지, 설교자로 몇십 년 왔는데 하나님이 더 절실하게 느껴지고 가깝게 느껴지시는지 궁금하다.
‘성경이 진짜냐, 세상이 진짜냐’ 두 유혹 사이에서 답 풀려
박: 무지무지하게 가까워졌다. 이루 말할 수 없다. 이 문제가 만만치 않은데, (정 목사님이) 고민하고 진정성을 가지신 분이다. 어디서 답이 풀리느냐 하면, 두 가지 유혹 사이에 있다. ‘성경이 진짜냐, 세상이 진짜냐’이다. 세상이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다 거짓이다. 세상은 생명을 죽이고 진리가 없으며 영광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성공은 있으나 명예는 없다. 이기려면 꼭 악한 짓을 해야 한다.
성경의 이야기는 그것이 진리라고 말한다. 저는 기독교가 ‘구라’라 해도 좋다. 믿는다는 건 다 알아야 믿는 게 아니다. 70년 가까이 살아온 경험으로 볼 때, 세상은 모두 구라이고 모든 것이 헛되다. 기독교인으로 사는 자야라만이 거기서 명예를 증언할 수 있다. 여호와는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분이심을 저는 평생 느꼈다. 목사였고 설교자였기 때문이 아니다. 지금 와서 저는 욕을 먹어도 되고, 지X한다 해도 떨고 나서 회개하면 된다. 인생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반전을, 역전을 시켜주실지 모르는 것이다. 십자가의 부활, 내가 원하는 결론 말고 하나님의 기적이 있다. 이미 제게 일어났던, 그걸 알게 됐다.
-마무리하면서, 한 말씀씩 부탁드린다.
정: 한국교회 설교자들이 구도적 자세로 올곧게 설교 행위를 할 수 있는 여건이 너무 열악하다. 이것을 해결하지 않으면 감당하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박 목사님이 설교자를 ‘어머니가 밥상을 차리는 것’에 적절히 비유해 주셨는데, 그러나 오늘날 어머니들이 전업주부만으로 살 수 없다. 돈도 벌어야 한다. 목회자들도 설교에 전념할 수 없다. 굉장히 실질적 문제인데, 이 구조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그럼에도 설교자로서의 길을 가야 하는데, 마지막으로 다른 건 접어두고 ‘공부하라’고 하고 싶다.
박: 삶에서 대부분의 조건들은 우리가 선택하지 않았다. 시간의 중간에 들어왔고 어느 공간에 떨어졌다. 그 모든 것 속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가 어느 부분에서는 잘못할 수도 있지만, 시간 속에 있는 것은 다음에는 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를 만회하고 속죄해서 안심시키려는 것이 한국교회에서 회개를 낳았다. 그러나 그 회개가 이미 일어난 과거를 씻어내는 대로 거꾸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행위가 되는 바람에, 나를 멋있는 내일로 이끌지 못한다.
내일을 준비해야 하는 데서 물러나, 못난 짓들을 하지 말자. 변명하고 누구를 비난하고 원망하는 걸로 도망가지 말자.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인생에 화답하시고 함께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