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장로교육원 총동회(회장:이덕선장로)는 7월16일 11시 기독교회관 2층 민들레영토에서 제 16회기 제 2차 임원회를 가졌다. 회의 전 예배는 수석부회장 조종수장로 인도로 찬송 450장을 다함께 부른 후 자문위원 한명수장로 기도와 인도자의 성경봉독(눅 23-34절)에 이어 직전회장 김용덕장로의 “알지 못 함이니이다” 제하 메시지가 있었다. 주기도문을 함께 드린 후 예배를 페하고, 2부 회무처리에서 유인물로 준비한 총회위임 안건인 영성수련회 등을 추인했다.
이번 회기에 처음으로 시도하는 영성수련회(세미나)는 국내의 성지순례를 1박2일로 하면서 이응삼목사(총회순교자기념사업회 상임총무)의 순교자 관련 강의와 정태기목사(크리스천치유상담대학원대학교총장) 의 강의도 듣게 된다.
첫 방문지인 전북 김제군에 있는 금산교회는 남녀부동석 (男女不同席) 형태의 기와집 건물로 지어져 있으며, 예배 인도자는 기억 자(字) 코너에서 남녀 양쪽을 다 볼 수는 있는 구조다.
교회개척은 1908년 전주선교부의 테이트(Lews Boyd Tate) 선교사가 지은 한옥교회이다. 조선 예수교 장로회의 사기(事記)에 의하면, 처음의 교회는 1905년에 5칸으로 지었으나, 1908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지은 것이라고 한다. 현재 금산교회 옆으로 1988년에 새로 지은 교회본당과 사택이 들어서 있다.
금산교회 본 예배당 건물은 남북방향으로 5칸이며, 여기에서 동쪽으로 2칸을 덧붙여 뒤집힌 ㄱ자 형태를 이룬다. 내부는 통 칸으로 이루어졌으며, 남북방향 5칸과 동쪽방향 2칸이 만나는 곳에 강단을 설치하여 남쪽으로 남자석, 동쪽으로 여자석을 분리하여 마련하였다.
이는 한국 초기 교회건축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형태로 한국 전통사회의 남녀구분이라는 큰 문제를 ㄱ자형 건물을 지어 남녀가 나뉘어 예배를 보게 함으로써 해결하려 했던 것이다. 당시 유교적 윤리문화가 보편화 되어 있던 때에 포교지의 문화에 적응한 선교사의 지혜를 느낄 수 있다. 한국의 전통 건축양식과 서양식 교회의 특징을 조화롭게 결합시킨 이 교회는 초기 교회건축의 한국적 토착화 과정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건물로, 건물 각 구조물의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문화재로 지정보존하고 있다. 교회당 마루바닥은 마감이 다소 거칠다. 당시 한문으로 쓰여진 당회의록도 보존되어 있는데 초기 선교사들이 교육을 잘 시킨 것으로 이해 된다.
이 역사적인 예배당 보다 더 감동적인 섬김의 스토리가 이곳에서 이루어 졌다.
“금산지역 대지주 조덕삼장로와 머슴 이자익목사의 이야기” 는 감동 그 자체다. 역사상 총회장을 3번이나 역임한 이자익목사는 김제군 금산 대지주 조덕삼의 마부 출신이다. 이자익(목사)은 13대와 33-34대 총회장을 역임했다 34회 총회 때가 1948년이니 장로교단이 갈라지기 전이다.
전북 김제 모악산 기슭에 위치한 금산교회는 1905년 테이트선교사에 의해 시작되었다. 전주에 선교본부를 둔 미국 선교사 테이트(최의덕)는 정읍을 가기 위해 모악산 자락을 넘어 금산리를 통과하곤 하였다. 말을 타고 다니는 선교여행이었기에 말이 쉬어가는 마방에 들렸고, 자연스럽게 마방(주막) 주인이었던 조덕삼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조덕삼은 예수를 영접하고 복음을 받아들였으며 조덕삼의 집 사랑채에서부터 금산교회가 시작되었다.
김제의 대지주(大地主) 조덕삼(1867~1919)의 할아버지 조정문, 아버지 조종인은 본래 평안도 출신으로서 중국 봉황성, 고려문을 넘나들며 홍삼장사 등 무역을 하는 거상으로 유명했다. 김제 부자로서의 조덕삼의 삶은 남쪽의 넓은 김제평야와 금산의 금광을 바라보던 아버지의 꿈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김제평야의 광활한 농경지, 그리고 금산의 금광에 대한 꿈을 안고 재산을 정리하여 단독으로 배를 빌려 이삿짐을 실고 남하하였다.
군산앞바다에서 만경포구(지경)를 거슬러 김제읍을 지나 금이 많이 난다고 해서 붙여진 금산에 도착한 조종인은 아버지의 유산으로 금광업에 투자하면서 평안도 거상답게 토지를 매입하고 정착하며 아들 조덕삼의 앞길을 튼튼하게 준비 하였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금산교회를 말할 때 조덕삼 장로 말고 빼 놓을 수 없는 또 한명의 인물이 있으니 조덕삼 장로의 머슴이었던 이자익목사다. 이자익은 어려서 경남 남해에서 고아로 생활하다가 입에 풀칠할 곳을 찾던 중 김제들녘까지 흘러들어와 조덕삼의 집 마방(마부)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조덕삼이 예수를 믿으면서 조덕삼을 말에 태워 교회로 모시면서 머슴의 신분으로 처음에는 예배당 밖에서 귀동냥으로 예배를 드렸다는 설도 있다. (60년 대 자가용 운전사가 모시는 사장과 함께 식사하기가 쉽지 않듯히) 주인 덕에 이자익은 금산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신앙의 돈독함을 인정받은 그는 주인 조덕삼, 그리고 박화서와 함께 1905년 10월 11일에 세례를 받았다. (110년 전이다)
그 후 교회가 점차 성장하여 교인이 50명 쯤 되었을 때 장로를 피택하게 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교인들이 모여 투표한 결과 지방의 유지이며 김제의 부자이고 금산교회 재정을 모두 감당하고 있던 주인 조덕삼을 제치고, 그 집의 머슴 이자익이 가장 많은 표를 얻어 장로로 피택 되었다. 이때 교인들이 술렁이며 근심하는 표정들이 영력했다.
그러자 조덕삼은 교회의 결정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교인들 앞에 나가서 "나는 하나님의 뜻을 겸허히 받아드려 이자익 장로님을 잘 받들고 교회를 더욱 잘 섬기겠습니다." 고 선언하였다. 그제야 투표결과를 놓고 불안해하고 초조해 하던 온 교회가 대 환영을 하면서 조덕삼에게 박수갈채를 보냈다. 이 두 사람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집에서는 주인과 머슴의 관계로, 교회에서는 평신도와 장로의 관계로 성실히 자기 본분을 잘 감당해 나갔다.
후에 조덕삼도 금산교회의 2대 장로가 되었다. 조덕삼은 자기 집 머슴인 이자익장로가 비록 자기집 머슴이지만 정직하고 성실한데다 머리가 좋다는 것을 알고 평양신학교에 유학을 보내 장학금과 생활비 일체의 경비를 부담하며 공부에 열중하도록 뒷바라지를 잘했다. 이자익이 신학을 마치고 목사안수를 받은 후에는 다시 금산교회 담임목사로 청빙을 하였다. 이런 연유로 인해 자기 집 머슴 이자익을 공부시켜서 담임목사로 청빙한 주인 조덕삼장로는 금산교회를 훌륭하게 섬긴 역사적 인물이 되었다.
이자익은 금산교회 담임목사로 목회하면서 놀랍게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13대(총회장소:함흥 신창리교회당) 총회장에 당선되었다. 이후에도 총회장을 두번을 더해 이자익목사는 총회장을 3번씩이나 역임하는 등 장로교회사(史)의 입지전적인 인물이 되었다.(33대총회 대구제일교회당, 34대총회 서울 새문안교회당) 그를 키워낸 인물이 바로 자기 집 머슴을 자기보다 먼저 장로로 받들며 교회를 섬겼던 조덕삼 장로이다. 이렇게 말씀대로 섬기는 신앙생할를 했던
조덕삼장로의 손자가 바로 전 국회의원이며 주일대사를 역임한 조세형 장로이다.
1908년도에 건축된 금산교회는 110년이 지난 지금도 처음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전북지방문화재 제136호로 등록된 “ㄱ자” 예배당이 바로 그것이다. 처음에는 ‘팟정리교회’ 혹은 ‘두정리(荳亭里)교회’로 불렸고 금산교회라는 이름은 1930년대 이후에 붙여졌다. (기와는 교체)
금산교회는 보존상태가 양호할 뿐만 아니라 한국식과 서양식의 건축특징이 병존하여 건축의 한국적 토착화 과정을 잘 보여준다. 5평 정도의 강단은 2단으로 꾸며 결과적으로 3층 구조를 하고 있는데 이는 한국 전래의 제단구조이면서 동시에 뜰-성소-지성소로 이루어지는 성막의 3중 구조를 연상케 한다. 금산교회당 안에는 초기부터 사용하던 풍금과 강대상, 강대의자 등이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ㄱ’자 예배당은 그 골조가 110년 동안 손상 없이 잘 보존되어 있었으나, 2001년 봄 대대적인 개보수작업이 이루어져 지금 더욱 완벽한 옛 모습을 갖추고 있다. 소재지 :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291, (박동현기자가 전에 직접 탐방 기억 및 관련 문헌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