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남노회 원로장로회 회원(부부) 30여 명은 11월 8일 09시 광성교회를 출발하여 제부도를 향했다. 제부도는 경기 화성시 서신면에 속한 섬이다.
차량 통행 바다길 도로가 있지만, 밀물 때는 도로가 물에 잠긴다. 썰물 때 버스가 들어갔다가 물이 들어오기 전에 제부도를 나와야 된다. 8일의 경우 1차 06시부터 14시35분, 2차 18시53분 다음날 03 07분이 차량통행이 가능한 시간이다.
물이 들어올 때는 날자마다 다르지만, 도로에서 1m ~3m 높이로 물이 들어온다고 했다.
임원 답사팀이 예약한 식당에서 회 등 해물식사를 한 후 바닷가 산책을 하고 사진촬영도 하면서 휴식을 취한 후 제암리 순교유적지를 향했다. 일행 중에는 나이 80세가 넘은 분들이 여럿 있고, 지팡이를 사용하는 분들도 몇 있다.
한편 이동하는 버스에서 드려진 예배는 부회장 허만호 장로가 인도하고, 회장 조용현 장로가 성경 시편 92:12-15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
창세기 1:28장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봉독하고 ‘결실하는 나무’ 제목으로, 자신이 중국선교를 13년 간 했던 간증을 했다. 주님 가르친 기도로 이동하는 버스에서 예배를 드렸다.
제암리교회 순교유적지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에 있다. 일제강점기 3·1독립만세운동 관련 순교지 및 순국선열유적지다. 3·1독립만세운동 당시 일본 헌병이 제암리(두렁바위) 기독교인과 주민 23명을 집단으로 학살한 만행사건의 유적지다.
제암리에 교회가 건립된 것은 1905년 8월 5일이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퍼져나가자, 제암교회 청년들은 4월 5일 발안 장날에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였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든 시간에 교회 청년들이 발안주재소(파출소)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장터에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이 독립만세를 따라 외쳤다.
이에 당황한 일본 순사(경찰)가 무력으로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가혹하게 폭행을 하여 많은 청년들이 상처를 입고 마을로 돌아왔다. 그러나 청년들이 밤마다 제암리 뒷 산에 올라 봉화를 올림으로써 지역 주민들의 만세운동은 계속되었다.
발안 5일 장날 만세운동이 있었고, 열흘 후인 4월 15일 오후 2시, 일본 경찰의 계획된 음모가 시작되었다. 수원에 주둔하고 있던 보병 제78연대 소속 아리타 도시(有田俊夫) 중위 등 일본 헌병 30여 명이 몰려와,
'발안 장날 너무 심한 매질을 하여 사과하고자 왔으니 15세 이상의 남자 신도들은 교회에 모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21명의 신도가 모이자 헌병들은 밖으로 나가 교회 출입문에 못 질을 하고 예배당 건물에 석유를 뿌린 다음 불을 질렀다.
헌병들은 교회를 포위한 채 교회 창문 안으로 총을 쏘았고, 삽시간에 교회 건물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그들은 무참히 죽어가는 남편을 살려 달라고 교회 앞에서 애원하는 두 아낙의 목을 베어 볏짚으로 불을 놓기까지 하였다.
만행을 저지른 헌병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동네에 불을 질러, 외딴집 한 채만 남고 32가구의 초가가 모두 불탔다. 멀리 오산에서도 그 불길이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사건이 일어난 지 며칠이 지나도록 일본 헌병들의 감시가 심해 누구도 희생자의 유해를 찾아내어 장례를 치를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현재의 제암리는 당시의 예배당 건물을 재현해 놓지 안했다. 현재의 제암교회 아래층에 기념관 안내소가 있지만, 당시 유적은 영상사진과 벽에 붙여진 사진 외에 유적이 없었다.
버스는 늦지 않게 출발지인 풍납동 광성교회에 돌아 왔다. 이날 이용한 버스는 광성교회가 제공했다. 회원 가정 당 고구마 10kg를 선물했다. 서울동남노회원로회(은퇴장로)는 코로나로 인해 지난 2년간 나들이를 못하다가 3년 만에 나들이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