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혁명은 모짜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으로부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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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은 모짜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으로부터 시작.
  • 박동현 기자
  • 승인 2022.11.11 22: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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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야권(初夜権)은 중세시대 영주가 자신의 영지에 소속되어 있는 남녀가 결혼할 때 그 신부와 먼저 하룻밤을 보낼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모자르트 죽음. 출처 구글사진 

피가로의 결혼(1786)은 아마데우스 모짜르트의 유쾌한 희극 오페라이다. 중세봉건시대의 부도덕한 관습인 초야권을 소재로 한 오페라이다. 주인공 피가로는 백작의 초야권 행사를 막기 위해 좌충우돌 우스꽝스러운 활약을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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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야권(初夜権)은 중세시대 영주가 자신의 영지에 소속되어 있는 남녀가 결혼할 때 그 신부와 먼저 하룻밤을 보낼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이 작품에는 초야권뿐만 아니라 그 당시 사회적 위계질서, 세습 특권, 무능한 관리, 검열 등 귀족들의 하층민에 대한 갑질을 통렬하게 고발하고 있다.

'피가로의 결혼'은 당시 쓰러져가는 구체제에 맞서 점차 성장해가는 시민계급의 활약상을 보여주고 있다. 피가로는 알마비바백작의 하인이다. 백작이 자신의 약혼녀 수잔나에게 ‘초야권’을 행사하려고 추근대기 시작했다. 백작의 초야권을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며 결심한 피가로는 백작부인과 수잔나 셋이 힘을 합쳐 백작의 의도를 저지시켜 나간다.

'피가로의 결혼'은 작품 전체에 모차르트의 아름답고 재치 발랄한 음악이 흐르고 있다. 당시 절대군주로 군림하던 루이 16세가 '피가로의 결혼'을 용인할 리 만무했다. 또한 귀족에 대한 조롱과 해학이 상류계층의 거센 반발을 가져왔다. 그리하여 이 작품이 공연되기까지는 수차례 수정과 검열을 거쳐야만 했다.

프랑스 혁명은 모짜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으로부터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피가로의 결혼'을 가르켜 ‘혁명보다 먼저 시작된 혁명’이라고 불렀다. 또한 프랑스 혁명 지도자 당통은 피가로의 결혼이 귀족을 날려 버렸다’며 찬사를 보냈다.

프랑스 혁명이 1789년 구체제(앙시앵 레짐)를 무너뜨렸다면, 피가로의 결혼은 이보다 3년 앞서 모짜르트의 손을 통하여 구체제를 유쾌하게 파괴시켜 나갔다. 프랑스혁명은 1793년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자 정점에 이르렀다.

프랑스 구체제의 몰락은 예술이 선도해 나갔다고 볼 수 있다. 피가로의 결혼은 4시간 반이라는 긴 공연시간에도 불구하고 18세기 프랑스 연극 최대의 성공작이 되었다.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 초라한 장례마차, 사람은 없고 개 한마리가 뒤따른다.

말년의 모짜르트는 오스트리아 최고 음악가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고 수입도 많았지만, 아내 콘스탄체의 낭비벽으로 인해 가산이 탕진되고 찢어지게 가난했다.

모차르트는 100듀캣(약 1억원)의 작곡료를 받기로 하고 레퀴엠(진혼곡)의 작곡을 시작했다.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에 병색이 완연한 상태에서도 진혼곡을 쓰기 시작했다.

모차르트의 건강은 눈에 띄게 쇠약해져 갔지만, 의뢰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온 힘을 쏟아 부었다. 그러나 작곡을 시작한지 두 달이 못되어 모차르트는 병상에 눕게 된다. 그리고 레퀴엠을 미완성으로 남긴 채 36세의 일기로 세상을 뜬다.

한 백작으로부터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자신의 아내를 위한 레퀴엠 작곡을 의뢰받았지만, 결국 이 마지막 작품은 모짜르트 자신을 위한 진혼곡이 되었다. 장례식에는 아내 콘스탄체조차 참석하지 못한 채 친구와 제자 몇 명에 의해 비엔나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천재음악가 모차르트의 장례식은 위대한 음악가의 장례식치고는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

필자 오세열 교수는 Midwest 대학원 리더십 교수이며 성신여대 명예교수, 목회학 박사(D.Min), 목사, 경영학박사(고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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