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체반정(文體反正)은 무엇인가? 오세열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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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반정(文體反正)은 무엇인가? 오세열 교수
  • 박동현 기자
  • 승인 2022.03.10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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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양반 사이에서 유행하던 새로운 문체였던 패관문체를 배척하고 정통적인 옛 고문문체를 부흥시키려 했던 정조의 개혁 정책이다. 오늘날로 치면 인터넷 신조어 배척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좋은 글을 써도 패관잡기와 관련된 글이라면 무조건 낙제점을 주고 영원히 과거를 볼 수 없도록 블랙리스트에 올렸다.
필자 오세열 교수는 Midwest 대학원 리더십 교수이며 성신여대 명예교수, 목회학 박사(D.Min), 목사, 경영학박사(고대)이다.​

주변을 살펴보면 많은 역사물들이 소비를 기다리는 상품처럼 시장에서 각축을 벌이고 있다. 영화는 물론 TV드라마, 소설, 게임, 광고 등 모든 대중적 장르에 파고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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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록은 지식 창고에 오래 쳐박아두고 곰팡내 나는 고리타분한 학문이 아니다. 실용적인 학문이 될 뿐만 아니라 삶의 무기가 될 수 있다. “역사를 모르는 사람은 자신이 나무의 일부임을 알지 못하는 나뭇잎과 같다.”고 마이클 크라이튼이 말했다.

독일 재상 비스마르크는 “어리석은 자는 자기 경험에서 배우고, 현명한 사람은 타인의 경험에서 배운다.”고 말했다. 여기서 타인의 경험은 역사를 의미한다. 따라서 역사공부에 실패한 자는 인생에서도 어리석은 자로 남는다.

조선시대에 일어난 반정(反正)으로는 중종반정과 인조반정을 들 수 있다. 반정(反正)은 돌이켜 바르게 한다는 뜻으로 명분상 실정을 하는 연산군과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새로운 왕, 중종과 인조를 세웠다.

그런데 문체반정은 정조가 잘못된 문체, 즉 글을 반정의 대상으로 삼고 이를 올바른 것으로 되돌린다고 선포한 사건이다. 정조는 사도세자와 혜경궁홍씨의 아들로 태어나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아버지 사도세자가 비참하게 뒤주에 갇혀 죽어가는 것을 보고 왕에 등극했다.

조선 후기 르네상스시대를 이끌어 온 정조는 탕평책과 개혁정치를 주도했고 특히 문예부흥에 힘썼다. 정조는 조선 27대 국왕 가운데 조정 신하들을 실력으로 누를 수 있는 가장 박학다식한 왕이었다.

세종도 쟁쟁한 실력을 갖춘 집현전 학자들과 경연에서 토론했지만 규장각에서 정조를 학문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학자는 없었다. 오히려 어떤 학자보다도 학문적으로 한수 위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정조는 문체오염을 이유로 중국으로부터 들어오는 패관(稗官)소설과 성리학에 어긋나는 책과 사상을 금했다. 패관이란 옛날 중국에서 임금이 민간의 풍속이나 정사를 살피기 위하여 거리의 소문을 모아 기록시키던 벼슬 이름인데, 이 뜻이 발전하여 이야기를 짓는 사람도 패관이라 일컫게 되었다.

초기의 패관은 사실성에 충실했으나, 점차 창의성이 가미되어 흥미 위주로 변화함에 따라 하나의 산문적 문학 형태가 되었다. 패관문학은 뒤에 소설 발달의 모태가 되었다.

정조는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패관문체로 씌여졌다는 것을 문제삼아 박지원으로 하여금 반성문을 쓰게 했다. 그러나 오늘날 연암 박지원은 자유분방한 한문체(漢文體)로 조선후기에 새로운 글쓰기의 지형을 개척한 천재문인으로 평가된다. 정조는 대과에서 장원으로 평가된 이옥의 답안지를 패관문체라는 이유로 꼴찌로 강등시켰다.

이는 당시 양반 사이에서 유행하던 새로운 문체였던 패관문체를 배척하고 정통적인 옛 고문문체를 부흥시키려 했던 정조의 개혁 정책이다. 오늘날로 치면 인터넷 신조어 배척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좋은 글을 써도 패관잡기와 관련된 글이라면 무조건 낙제점을 주고 영원히 과거를 볼 수 없도록 블랙리스트에 올렸다.

정조와 정약용

25세에 왕으로 즉위한 정조는 예문의 승진시험에서 가장 좋은 성적으로 선발된 신하 세 사람을 불러 자기 앞에서 다시 특별시험을 보게 했다. 그 결과 셋 다 백지답안지를 냈다. 과거시험의 폐단이 드러나게 되었고, 정조는 시험관과 관리들을 처벌했다.

정조실록에 의하면 과거시험의 경쟁률은 1만대 1이 넘었고 최고 5만대 1의 과열현상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시대 평민들은 대다수가 농업에 종사했고 일부 어업, 상인 정도가 전부였다.

백성의 95%이상이 농업에 종사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직업이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출세 길은 과거시험에 합격하는 것이었다. 문과와 무과는 노비를 제외한 모든 계층이 응시할 수 있었지만, 잡과에는 이런 제한이 없으므로 인분을 나르던 사람도 과거시험을 보러 갔다.

과거 고사장은 북새통을 이루었고 감독소홀로 컨닝과 대리시험 등 다양한 부정행위가 다반사였다. 정조는 이러한 과거시험의 폐단을 개선하기 위해 새로운 인재등용법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초계문신(抄啓文臣)제도이다.

과거에 합격한 관리라 할지라도 규장각에 소속되어서 재교육 과정을 밟게 했다. 과거에만 합격하면 더 이상 학문에 정진하지 않는 관리들에게 경종을 주는 제도였다. 정조 재임기간 중 배출된 초계문신으로는 정약용을 포함하여 138명에 이른다.

정조는 초계문신제도를 시행함으로써 문예부흥의 기틀을 마련했다. 한편 오늘날 국문학계에서는 당시 새싹을 틔우고 있던 문체가 정조의 탄압으로 쇠퇴했다고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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