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선언! 정인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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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선언! 정인교 목사
  • 박동현 기자
  • 승인 2023.05.23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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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가 이러한 예수의 정신을 계승한 것은 그들이 행한 유무상통에서 확인되지요. 부자들이 땅과 전답을 팔아 사도 앞에 가져오면 가난한 자들이 그들의 필요를 따라 그 돈을 사용했습니다. 그 결과 교회에 가난한 자가 하나도 없었습니다!(행 4:34)
정인교 목사

마태복음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구약성서에 나타난 복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번영과 행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복은 많은 자녀, 장수, 현숙한 아내, 많은 재산, 그리고 사람들의 존경과 신임 등으로 표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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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인간의 번영과 행복의 원천은 하나님이고 행복과 불행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결정됩니다. 그래서 시편 128장1절은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를 행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구약을 관통하는 핵심은 복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신앙을 준수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이스라엘은 어떠한 이방신도 금지했습니다. 가나안에 입성할 때에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가나안 일곱 족속을 멸하라!‘는 비인간적 명령도 이런 맥락을 반영한 것입니다.

동시에 이스라엘은 일체의 우상 숭배를 금지했습니다. 신의 형상을 그리거나 만들거나 주조하면 죽였습니다. 구약을 관통하는 소위 신의 형상 제작 금지명령(Gottes bild verbotenheit)은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나님을 규정할 수 없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만일 유한자가 무한자를 완벽히 이해하고 규정할 수 있다면 유한자가 무한자 위에 서는 모순이 발생하거든요.

그런데 신약으로 넘어오면 두 가지 특이한 사항이 발생합니다. 먼저 구약성서를 관통하여 강조하던 자손이니 땅이니 하는 물질적인 복 개념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 대신 믿음 가운데 얻는 기쁨, 평안, 구원처럼 복의 개념이 영적인 의미로 승화되어 나타납니다. 두 번째로 구약성서에서 일관되게 강조했던 이방신이나 우상숭배금지가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예수님이 강조하신 우상숭배금지 내용이 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영어성경에서는 재물을 맘몬(Mammon)으로 적고 있습니다. 원래 영어의 맘몬은 헬라어 “맘모나스”(Mammonas)를 번역한 것인데, 이 단어는 아람어 맘모나(Mammona)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원래 이 단어는 “사람이 신뢰하는 무엇” 혹은 그와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만, 사람이 신뢰하는 대상이 대부분 재물(재화)임이 분명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는 모든 물질적인 ‘재물’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이 단어를 단지 그 의미상의 이해를 넘어 하나님과 대비되는 것으로 의인화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맘몬이 사람들 사이에서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맘몬을 하나님과 대비되는 돈의 신으로 의인화시킨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통찰은 정확했습니다. 인간의 역사를 보세요. 모든 인류 역사의 초점은 언제나 이 맘몬 즉 물화적 가치였습니다! 단 한번도 인간 자체가 초점이 된 적이 없습니다. 인류 역사상 흥왕했던 수많은 제국들과 그들이 벌인 살육의 전쟁들, 오랜 서구의 식민지 역사, 흑인 노예제도, 그리고 최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침공에 이르기까지 핵심은 맘몬 즉 물화적 이득이 그 목표였습니다.

이런 전쟁이나 가시적 폭력이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흐름이나 인간을 대하는 태도롤 보세요. 그 초점이 인간 자체의 존엄성이 아니라 그가 가진 효율성, 재화적 가치에 모아져 있지 않습니까?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은 매우 독특한 존재입니다. 그는 세상이 버린 비효율성, 비물화적 가치의 상징인 죄인, 창녀, 그리고 세리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예수의 관심 그리고 하나님의 관심은 바로 인간과 생명 그 자체에 있습니다!

초대교회가 이러한 예수의 정신을 계승한 것은 그들이 행한 유무상통에서 확인되지요. 부자들이 땅과 전답을 팔아 사도 앞에 가져오면 가난한 자들이 그들의 필요를 따라 그 돈을 사용했습니다. 그 결과 교회에 가난한 자가 하나도 없었습니다!(행 4:34)

동시에 사회 속의 수직적 인간관계가 교회 안에서는 ‘사랑하는 주님 앞에 형제자매’라는 수평적 형제자매로 변화되었습니다. 이로써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교회가 무엇인가를 정확히 보여주었습니다: 교회는 맘몬이 만든 재화적 가치와 효율성이라는 세상의 가치를 무효화시킨 세상 가치의 공동묘지이다!

예수는 인간을 물화적 가치를 위한 도구로 전락시킨 맘몬의 시도를 거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는 인간과 생명이라는 예수의 정신을 그대로 실현하였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예수를 믿는다 혹은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대로 모방하는 것(Imitatio Jesus)입니다. 그분의 정신과 가치관 그리고 삶의 모습을 그대로 흉내내는 것입니다. 물질 가치와 효용성만으로 인간 대하는 맘몬세력에 맞서 예수처럼 사람 그 자체 생명 그 자체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예수처럼 온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얻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고 같은 마음으로 함께 연대하는 것입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가 했던 말을 기억합니다: ‘한 마을에 목사가 있다는 것은 그 마을에 분란자가 있다는 의미이다. 모두가 자기 이익 때문에 불의에 대해 침묵할 때 ‘아니요!’하며 그 조작된 평화를 깨고 나서는 분란자가 바로 목사이다!‘

어디 목사만 분란자이겠습니까? 예수를 구주로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 모두가 맘몬이 만든 거대한 죽음의 물결에 당당히 생명 살림으로 맞서야 하지 않습니까? 예수가 외로운 싸움을 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 싸움을 계속해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인교 목사 강남성결교회 담임, 서울신대 설교학 교수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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