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쁨의 가치관은? 신성욱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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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쁨의 가치관은? 신성욱 교수
  • 박동현 기자
  • 승인 2020.09.23 17: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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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스티븐슨(Mary Stevensen)의 시 일부..
“사랑하는 내 아들아, 나는 너를 사랑하고 너를 결코 떠난 적이 없단다. 시험과 역경으로 네가 고통스러워할 때, 너는 오직 한 짝의 발자국만 보지 않느냐. 그러나 그 발자국은 네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업고 걸어갔던 바로 그때 내 발자국이란다.”
생의 마지막 순간 내 앞에 펼쳐진 장면에서 나는 모래 위의 발자국을 보았네. 내 삶의 무수한 길에 오직 한 짝의 발자국만 찍혀 있음을 보았네. 그때가 내 삶에서 가장 침울하고 슬플 때였음을 알았다네.

 ‘모래 위의 두 발자국’(Footprints in the Sand)이란 시가 하나 있다. 이동원 목사가 젊은 시절 한국어로 번역하여 유명해진 메리 스티븐슨(Mary Stevensen)의 시이다. 원문을 직접 번역해서 여기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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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밤 나는 꿈을 꾸었네. 

하늘을 가로질러 문득 지나온 삶의 순간들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간 꿈 말이네. 그 펼쳐진 장면에서 나는 모래 위에 두 짝의 발자국을 보았네. 한 짝은 내 발자국, 또 한 짝은 주님 발자국.

생의 마지막 순간 내 앞에 펼쳐진 장면에서 나는 모래 위의 발자국을 보았네. 내 삶의 무수한 길에 오직 한 짝의 발자국만 찍혀 있음을 보았네. 그때가 내 삶에서 가장 침울하고 슬플 때였음을 알았다네.

나는 의아해서 주님께 물어보았네. “주님 제게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나요? ‘네가 나를 따르기로 결심했다면 늘 나와 함께 걷게 될 것이야!’ ‘그런데 주님, 한 짝의 발자국만 찍혀 있을 때가 제 삶에서 가장 어렵고 힘들 때였음을 봅니다.’

‘주님 왜 제가 주님을 그토록 필요로 할 때 저를 떠나계시고 혼자 걷게 하셨는지 이해할 수가 없네요.’ 그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네.

“사랑하는 내 아들아, 나는 너를 사랑하고 너를 결코 떠난 적이 없단다. 시험과 역경으로 네가 고통스러워할 때, 너는 오직 한 짝의 발자국만 보지 않느냐. 그러나 그 발자국은 네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업고 걸어갔던 바로 그때 내 발자국이란다.”

모래 위의 발자욱
모래 위의 발자욱

너무도 성경적이고 감동적인 시이다. 삶의 고난과 시험 중에서 주님조차 침묵을 지키고 계실 때 우리는 주님을 원망하고 절망에 빠지게 된다. 주님이 살아 계시다면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아픔과 고통에 왜 침묵하시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때가 많다.

하지만 그 어떤 순간에도 주님은 우리와 함께하시고, 견딜 수 없는 때에는 우리를 업고 걸으심을 기억해야 한다. 그 때문에 오늘의 내가 있음을 놓치지 말자.

그런데 이 시의 주인공이 시간이 지난 다음 다시 꿈속에서 모래사장에 있는 또 다른 발자국을 보게 된다. 어렵고 힘든 시기에 여전히 발자국은 하나밖에 없었다. 예수님의 발자국이 분명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그 발자국은 지그재그로 흐트러져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다시 묻는다. “예수님, 힘든 저를 업고 도우시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어요? 저로 인해 정말 힘드셨지요? 죄송해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아니다, 얘야! 저땐 힘들어서 그런 게 아니라 내가 너를 업고 춤을 추며 걷다보니 발자국이 저 모양이란다.”

‘모래 위의 두 발자국’ 2탄이다. 유머가 섞인 감동적인 시로 업그레이드 된 것이다. 과거 지구촌교회에서 이동원 목사님과 최초로 만난 날 나는 그분의 사무실에서 이 2탄의 내용을 소개해드린 적이 있다.

그로부터 두 달 뒤쯤 지구촌 교회에 예배를 드리러 간 적이 있는데, 설교 중에 이 목사님은 그날 나로부터 들은 ‘모래 위의 두 발자국’ 2탄을 예화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한 신학교 교수에게 들었다는 출처를 밝히면서 말이다. 내가 전해드린 예화를 설교 중에 활용하니 감동이 배가됨을 느꼈다. 필요할 때 바로 선용하는 그분의 응용력이 신선하게 와 닿았다.

살다 보면 어려운 일을 당할 때가 많다.

필자 신성욱 교수
필자 신성욱 교수

자신의 실수로 인한 고난이나 원치 않는 일로 인해 경험하는 시험 말이다.

힘든 일을 당하면 헤어나기 무척 힘든 게 연약한 우리 인간이다. 그럴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누구일까? 부모이다. 그렇다.

자녀가 의지하고 기댈 최고의 대상이 있다면 부모이다. 부모에게 있어서 최대의 기쁨은 무엇일까? 사랑하는 자식이 어려울 때 도와주는 것이다. 그 무엇보다 불가능의 상황에 있는 자녀를 도와주는 일은 최고의 기쁨일 것이다.

그런데 인간 부모는 자식의 어려움이 무엇이든 항상 도와줄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자식이 어려움에 빠져 헤어나지 못할 때 도울 능력이 없어 부르짖는 부모의 모습을 볼 때가 종종 있다. 하지만 우리 주님에겐 한계나 불가능이 없다. 그분은 힘겹고 괴로운 성도들을 돌보시고 위로하실 때 제일 기뻐하신다. 춤을 덩실덩실 추실 정도로 말이다. 그게 바로 주님과 우리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내 인생에 남아 있는 한 사람의 외로운 발자국은 어려울 때 나를 업고 가신 주님 발자국이요, 지그재그로 흐트러져 있는 보기 흉한 발자국은 나를 업고 춤추며 가신 주님 발자국임을 새삼 되새겨 본다.

오늘 내 기쁨의 가치관은 무엇인가? 내게 있어서 최대의 기쁨은 어떤 것인가? 수많은 사람들과 별 차이 없이 자신의 이익만을 위한 기쁨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주님처럼 약하고 가난한 사람을 위한 기쁨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다시금 깊이 반성해 본다.

내 남은 생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한, 그리고 주변에 주님의 손길이 필요한 모든 이들을 위한 기쁨으로 살아가길 조용히 다짐한다.

필자 신성욱 교수는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설교학 교수이다.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에서 공부했음, University of Pretoria에서 공부했음, Calvin Theological Seminary에서 공부했음, 총신대 신학대학원에서 언어학 전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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